Ep20.│달콤하고 찬란했던 아스토르가에서의 하루.
오랜만에 받은 알베르게의 이불이 너무 포근했던 탓일까.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옆 베드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그제야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 밤, 같은 방을 썼던 미국인 형이 몇 시에 출발할 것이냐는 물음에
우리는 호기롭게 5시에 출발할 것이라고 답했다.
게슴츠레 뜬 눈 사이로 정면에 서있던 미국인 형의 모습이 비집고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형은 미소를 지었다. "푹 잤어?"라는 형의 물음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너무 포근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는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났다.
계획한 시간이 틀어졌지만 순례길에 완벽히 적응한 우리에겐
어느새 여유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까미노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앞에 걸어가는 여행자들을 경쟁자 삼아 따라잡기 급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들보다 빨리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까미노 길 위에서 천천히 걸으며 충분히 길가의 풍경들을
나의 두 눈에 고스란히 담았다.
여유로운 마음이 생겨서일까.
따사로운 햇살은 너무 튀지 않게 풍경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우리의 까미노 여정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의 도착지인 아스토르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던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마친 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콜릿 귀신인 우리가 초콜릿 박물관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재빠르게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1시간 남짓 구경을 마친 우리는
기념품으로 나눠주는 초콜릿 한 봉지와 기념품 샵에서 파는
다크 초콜릿 한 봉지를 손에 들고 주교궁으로 향했다.
우리 눈에 들어온 주교궁은 마치 디즈니 영화 오프닝에 나오는
신데렐라 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쉴 틈 없이 사진을 찍은 뒤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넓은 아치형 천장의 웅장함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오색빛깔 햇살의 찬란함에 넋을 잃고 말았다.
문득 나를 표현하는 색은 어떤 색일까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리쬐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나뭇잎의 찬란한 초록색일까,
보석같이 반짝이는 윤슬을 품고 있는 바다의 광활한 파란색일까,
아니면 까미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지었던
선한 미소를 연상시키는 노란색일까.
단숨에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한편으론 하나의 색으로 한정 짓기는 싫다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의 색은 다채로웠으면 좋겠다.
여러 색들이 모여들어 잘 어우러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게 나의 목표이다.
색상이 너무 짙은 순간에는 나의 채도를 낮춰 밸런스를 맞추고, 무채색을 지닌 사람에겐 햇살 한 줌 머금은 따사로운 노란색이 되고 싶다.
주교궁 곳곳을 둘러본 우리는 주교궁에서 나와 옆에 있던
아스토르가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엄청난 높이의 대성당 외벽에는 수만 가지의 조각들이 새겨져
그 장엄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잠시 쉬겠다던 동원이를 뒤로하고 아스토르가 대성당에 들어가
쉴 틈 없이 돌아다니며 엄마에게 보내줄 사진을 찍기 바빴다.
엄마의 버킷리스트였던 산티아고를 가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너무 좋겠다며 나보다 더 설레어했다.
사진을 찍으며 다시금 엄마와 함께 이 길을 걷겠다는 다짐을 되새긴 뒤
성당에서 나와 엄마에게 사진을 보냈다.
'엄마, 여기 너무 멋있는 곳이 많네. 다음에 꼭 같이 오자.'
우리의 배꼽시계가 요란히 울릴 때면 어김없이 저녁시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스토르가에 도착해 맛집을 찾아보던 우리의 레이더에 미쉐린 식당이 들어왔다.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거다!"를 외치며
한국에서도 먹어보지 못했던 미쉐린을 먹기 위해
근처 Las Termas라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맛집답게 이미 식당 안의 테이블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운 좋게 남은 테이블에 착석할 수 있었다.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예약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식사가 불가하다는 전달을 받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주문한 와인이 먼저 나오고 고기 메뉴와 스튜, 병아리콩 요리가 차례대로 나왔다.
우리 입맛엔 너무 짰던 소시지를 제외하고는 접시를 싹 비웠다.
이후 후식으로 나온 시나몬이 뿌려진 커스터드와 아몬드 케이크에
커피까지 마시자 더 이상의 여한이 없을 만큼의 그야말로 완벽한 저녁식사였다.
한껏 신이 난 우리는 저녁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일기장과 초콜릿 박물관에서 사 온 다크 초콜릿을 들고 잘 가꾸어진 뒷마당으로 나왔다.
다크 초콜릿 가루가 옷에 묻지 않게
조심스럽게 손으로 바쳐 입안에 무사히 머금었다.
입 안이 너무 쌉싸름해질 무렵 초콜릿을 베어 물자
순식간에 달콤함이 밀려 들어왔고
다시금 너무 달달하다고 느껴질 때쯤
그 타이밍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쌉싸름함이 입안에 맴돌았다.
해가 바뀔수록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졌다.
왜 자꾸 한쪽으로 치우칠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여행을 떠났다.
그러다 여행을 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인사를 나누는 사소한 순간들에 미소 짓고 행복해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일상에서 미소를 짓게 하는 사소한 순간들을 잘 챙길 때
삶의 만족도가 올라간다는 것을 말이다.
조금만 겸손해지면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순간이 주는 감사함을 볼 수 있다.
큰돈을 써서 여행을 가야 하거나 대단한 경험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그저 주어진 오늘의 일상에서 미소를 한번 지었다면
오늘만큼은 자기 전 나의 머리를 충분히 쓰다듬어 줄 수 있는 하루를 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