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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래블러 Sep 30. 2022

뭘 해도 꼬이는 그런 날 #4

Ep4.│모든 순간이 행복하길 바랐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다.


유난히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전날 파리의 색감에 취해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탓인지

기절하듯 저녁에 잠이 들었었다.

덕분에 개운하게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돌아다니기 전, 먼저 순례길을 걸을 때 필요한

선크림과 바세린을 사기 위해

숙소 근처의 파마씨*에 가기로 했다. 


왜 하필 운동화를 신고 싶었을까?

배낭에 순례길을 걸을 때 신기 위해 넣어 두었던

운동화를 꺼내신고 숙소를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풀어진 신발 끈을 묶기 위해

쓰고 나왔던 선글라스를 벗어

옷의 단추 사이에 걸어두고

신발 끈을 묶기 시작했다.


한참 묶고 있던 도중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동원이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순식간이었다.

내 옷에 걸려있던 선글라스는

마치 엘리베이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의 좁은 틈 사이로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가끔 인생에서 어떠한 순간에 인생 네 컷이 그려지듯

느리게 흘러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군대 피엑스에서 맞선임과 양손 가득 먹을 것을 사들고 가다가

턱에 걸려 넘어져 날았던 순간 이후 두 번째였다. 


- '어? 떨어졌네'

- '어? 저 틈 사이로 들어가나?'

- '발로 찰까?'

- '헐, 들어갔다' 


분명 2초도 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저 네 컷의 필름이 내 머릿속에서

기승전결이 완벽한 영화를 상영하듯 흘러갔다.


파마씨로 걸어가는 5분 동안 '발로 찼었더라면',

'운동화를 신지 않았더라면', '옷에 선글라스를 걸치지 않았더라면'을

되뇌며 후회와 한숨으로 가득 찬 길을 걸어갔다.


사실 전날, 파리의 다채로운 색감과 향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끼고 지나치기에 아까운 풍경이라며

선글라스를 꼈다 뺐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 "선글라스 끼는 게 사치야, 선글라스 필요 없을 것 같아."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입이 방정이다...


파마씨에 가기 전 마켓에 들렸다 나오는 길,

한 할머니께서 장바구니를 끌고 마켓 문턱을 내려가시다

휘청이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 장바구니를 잡아드렸다.


할머니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연신 내게 "merci"를 외치시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셨다.

순간 뿌듯한 마음이 들며 할머니의 온화한 미소와 함께

선글라스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착잡한 마음은

마치 일몰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나에게 있어 후회는 5분이면 충분했다.

아니, 더 이상 나의 첫 해외여행의 순간을

벌써부터 후회로 채워나가기 싫었다.


다행히 나는 일상을 살아갈 때

나름 긍정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해왔고

훌훌 털어버리는 성격이었기에

나의 긍정 세포를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파마씨로 가는 길에 

- "맞아, 분명 내가 선글라스를 잃어버린 건

   여행의 모든 순간들이 선사하는 풍경들을

   있는 그대로의 색감으로 더 잘 보고 충분히

   느끼라는 것일 거야"


옆에 있던 동원이는 신기해했다.

분명 마켓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툴툴거리던 친구가

갑자기 긍정왕이 되어

기분이 다시 업 되어있는 상태지 않은가.


분명 다 뜻이 있었을 거야.

파리에서 잃어버린 문제의 선글라스

파마씨(Pharmacie) :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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