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불행은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유난히 파리의 공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선글라스는 지워진 지 오래다.
아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같은 날이었다.
튈르리 정원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으로
맛있는 파스타와 에스까르고*를 먹고
라파예트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에 있는 매장들을 구경하며 올라가던
우리의 시야에 서점이 들어왔다.
마침 나는 표지를 볼 때마다 파리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기억날 수 있게 해주는 책을 사려고 했던 참이었다.
서점을 천천히 돌아보다 파리 느낌이 물씬 나는
포캣북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불어를 할 줄 모르지만 이 책을 볼 때마다
파리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었고
언젠가 이 책을 꼭 혼자 힘으로 읽어 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책을 구매했다.
오늘 저녁에는 개선문에서 노을과 야경을 보기로 했다.
백화점에서 나오니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을 향해가고 있었다.
구글맵을 켜고 개선문 근처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아보다
샌드위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던 우리는
동시에 "이거다!"를 외치며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에스까르고(Escargot) : 프랑스식 달팽이 요리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준 여사장님.
덕분에 우리는 별 탈 없이 주문을 마쳤고
완벽한 한 끼와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금 외국에 나와있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7월의 파리는
저녁 10시 정도가 되어야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를 먹고 여유를 부리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저녁 7시 30분.
앱에서 결제했던 개선문 입장권을 들고 개선문으로 향했다.
10분 정도를 걸어 개선문에 도착하여 올라가기 전
개선문 아래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담아둔 우리는
272개의 계단을 올라 개선문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불행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오늘 아주 날을 잡고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분명했다.
밖에 있는 풍경을 보기 전
개선문 안에 있던 기념품점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여행 엽서에 진심인 나는 엽서들을 구경하다
그제야 문득 내 손이 너무 가볍다는 것을 눈치챘다.
- "헐, 내 책!"
그럼 그렇지.
흔적 남기기 대마왕인 내가 숙소 엘리베이터에 이어
파리의 샌드위치 가게에 또 한 번
나의 흔적을 남기고 온 것이었다.
현재 시간 저녁 8시.
급하게 구글맵을 켜고 식당을 검색해 보니
1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저녁 9시에 문을 닫는다고 적혀있었다.
즐기고 행복하기만 해도 아까운 여행에서
또다시 불행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사실 혼자 여행을 와서 겪은 일이었다면
조금은 덜 속상하고 금방 털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원이랑 같이 온 나는 나의 실수로 인해
우리의 추억뿐만 아니라 동원이의 소중한 기억의 한 부분을
내 눈치를 보는데 쓰도록 만든 내가 싫었다.
한없이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결국 30여 분 정도밖에 구경하지 못한 나는
동원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나 내려가서 책 찾고 올 테니까 너는 위에 남아서
야경까지 구경하고 내려와."라는 말을 남긴 채
아경에 야자도 구경하지 못하고
샌드위치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왔던 계단을 한숨과 함께 내려가고 있을 때,
기억 저 편의 동산에 숨어 있었던 선글라스에 대한 기억이
해 질 녘 그림자가 길어지듯 스멀스멀 내게 다가왔다.
가게에 도착하니 다행히 사장님은 마감 청소를 하고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 "아까 여기서 음식을 먹었는데, 책을 놓고 갔어요.
혹시 보관하고 있나요?"라고 말하니
사장님은 단번에 나를 알아보고 보관하고 있었던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 머릿속엔 최악의 경우,
가게 문이 일찍 닫아 책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가게 사장님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착잡한 마음과 함께 동원이에게 '책 찾았어'라고 문자를 보냈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진 우리 둘은
'내가 아래에 서 있을 테니까 위에서 손 흔들어봐'라며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서로를 쳐다보고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가벼운 장난을 치고 동원이에게
내 몫까지 열심히 즐겨달라는 말을 전한 뒤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무리 긍정왕이라 해도
두 번의 실수를 했던 탓인지
나의 마음속은 소용돌이치듯 복잡했다.
무작정 걷는 게 필요했다.
평소에도 산책을 즐겨하던 나는
주로 산책할 때 생각 정리를 한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곳이지만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재생한 뒤 구글맵을 켜지 않은 채
개선문을 중심으로 뻗어있는 여러 갈래의 길
이곳저곳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눈물이 나올 뻔했다.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래, 이럴 땐 나의 솔직한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훌훌 털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마음 한켠에 꾸역꾸역 눌러 놓았다면
언젠가는 터지게 될 감정들이었다.
그 감정들을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을까.
30여 분을 걸을 때쯤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나의 마음이
잔잔한 물결로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오로지 나의 실수였다.
우리는 항상 완벽할 수 없기에 실수하고 실패하며
그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분명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키가 클 때 성장통이 존재하며
우리가 과거의 모습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듯이,
실수와 실패를 마주했다면 그 당시엔 아프고 견디기 힘들겠지만
그것을 딛고 성장할 수 있길 바란다.
지금까지 잘 해온 당신은 앞으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이 든 나는 다시 한번 긍정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 '개선문을 30분밖에 즐기지 못했지만,
내가 오늘 산 책을 더욱 읽고 싶어 지게 만듦으로써
파리에서의 경험과 여운을 더욱 깊게 새기기 위함이었음을'
- '위에 있었으면 보지 못했을
개선문 아래에서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함이었음을..'
어느덧 해가 지고 거리에 우두커니 서있던 가로등에
하나둘씩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자
동원이에게서 이제 내려간다는 문자를 받았다.
몇 분 뒤 저 멀리서 걸어오는 동원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은 잠시 뒤로하고
제대로 동원이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 "미안해, 나 때문에 정신없었지?
여행 와서 이런 일 겪게 해서 미안해."
- "아니야, 난 위에서 바닥에 앉아
이어폰 꼽고 노래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
웃음이 나왔다.
누구보다 속상한 나를 위해 해준 말일 수도 있지만
그 말 한마디가 들고 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후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에펠탑을 향해 걸어갔다.
불빛이 켜진 에펠탑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왜 에펠탑을 보러 오는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는 풍경이었다.
넋을 놓고 에펠탑을 보며
다시 한번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오늘의 일은 오늘에 남겨두고
내일은 또 다른 여행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는 조용히 파리의 에펠탑을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길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