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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awer Nov 07. 2019

용기, 너무 일찍 땡겨서 써버렸다.

이거, 감당 가능한 사람만 아이 낳기. 약속!

오늘은 가볍게 나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에피소드라고 쓰긴 했지만, 내 어린 시절 사건사고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을 가져와봤다. 나는 엄마나 이모들 말에 의해도 유별나게 부잡스러운 아이였기에...

(하하 제목 어그로 죄송합니다ㅎㅎ)



1.

내 발바닥을 할퀴어버린 녀석, 델몬트 오렌지쥬스


3세 쿠폰이는 물이 너무 마시고 싶었다.

그러다 엄마 아빠가 냉장고 문을 열어 델몬트 유리병을 꺼내 물을 꺼내던 모습을 기억해낸 것이다. 엄마는 1년 6개월이 차이나는 갓난쟁이 남동생을 안은 채,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 냉장고는 요즘 나오는 양문형 냉장고가 아니라 2층짜리 냉장고였다. 냉장고 아래쪽 문을 잡아 낑낑대며 열고, 보리차가 담긴 그 무거운 델몬트 주스병을 꺼냈다.


왜 냉장고에서 차가운 음료를 꺼내면 용기 겉면에 촉촉하게 물방울이 맺히는 걸 모두 경험했을 거다. 작은 손은 그 미끄럽고 무거운 유리병을 견딜 힘이 없었고, 결국 놓쳐버려 물병이 와장창 쨍그랑 깨졌다.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엄마.

어린 나는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을 자근자근 밟으며 엄마를 향해 걸어간 것이다. 여린 발바닥에 깨진 유리조각이 상처를 내고, 피는 엎어진 물에 잉크처럼 번져 삽시간에 방바닥은 붉은빛이 되어버렸다.


3살 배기 나는 그 유리조각이 아픈 건지 뭔지도 모르고 본인도 깜짝 놀라서 걸어간 거지...


엄마는 그대로 나를 어깨에 들쳐 매고 응급실로 달려갔다고 한다. 너무 놀라서 병원까지 가는 데 엄마 옷은 뻘건 핏 빛으로 물들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끔찍해 몸서리가 쳐진다고...




2.

나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첫 돌 이후로는 어디든 올라가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서랍, 책장, 그 옛날 두꺼운 브라운관 티브이, 이불 장롱 가리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가 천장을 찍는 것이 특기였다. 낮은 서랍장부터 DVD장, 텔레비전까지 하나하나 착착 야무지게 밟고 올라 맨 위에 도착하는 거다.


그렇지만 그 어린애가 내려오는 법은 어떻게 알겠는가. 그냥 이제 뛰어내리는 거지.

뛰어내림 에피소드들도 꽤 여러 개가 있지만 그중의 최고봉은 아마 5-6살 즈음 일어난 "복도 투신 사건"인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복도형 아파트 13층에 살았었다. 하지만 우리 집 아파트에서 일어난 건 아니고ㅎㅎ 저 밑에 3층, 이런 복도형 아파트에 살던 동네 이모였는지 아님 진짜 친척집이었는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초대를 받은 그 집에서 한바탕 떠들썩하게 떠들고 난 후, 나설 때였다.

엄마 아빠와 이모 내외는 현관에서 미처 못 다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좀이 쑤셔 그 틈을 견디지 못한 나는 헐레벌떡 신발장을 지나 복도로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위 사진에 왼쪽 틈 같은 짧은 난간을 하나씩 밟아 복도 벽에 올라탔다. 말을 타는 자세로 가랑이 사이에 복도 벽 위에 올랐다.

인사를 나누며 나오던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고 깜짝 놀라 했고, 일 순간 기우뚱.


복도 벽 위에 이랴이랴 하며 있던 나는 복도 안쪽이 아닌 아파트 밖으로 기울어져 어른들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 아파트에서 떨어져 내려 버린 것...


그래도 다행히 3층이었고, 또 정말 정말 큰 오래된 단풍나무 가지에 내가 걸렸다. 헐레벌떡 복도 난간 너머를 내다본 엄마는 눈가에 피가 흘러 제대로 눈도 못 뜨는 나를 보고 또 기절할 뻔했다고 한다. 나뭇가지에 눈두덩이 쪽이 길게 베인 거다. 그래서 나는 쌍꺼풀이 없는 홑꺼풀 눈매를 가졌지만, 왼쪽 눈 위에 쌍꺼풀 같은 길쭉한 흉터가 있다. 가끔 피곤하면 진짜로 그 밑으로 쌍꺼풀 주름이 잡힌다 ㅋㅋㅋ


아파트 3층에서 떨어져내린 아이, 그리고 쳐다보니 눈에 피가 철철...

효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3.

지금 하라면 절대 절대 못할 것 같은 일을 하나 떠올린다면, 진짜 가파른 비탈길에서 자전거 타기다. 하지만 유치원생이던 나는 스릴과 스피드를 즐기던 열혈 어린이였다.

여느 날처럼 자전거를 끌고 나와 동네 몇 바퀴를 돌았다. 그때 당시에는 보호장구를 잘 끼지 않았었고 당연히 나도 헬멧이고 무릎보호대고 다 귀찮은 것이었다. 좀 넘어지고 까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는 본 투 비 여장부였던게지.


무료함을 느낀 나는 가파르기로는 한국에서 둘째가면 서러운 우리 동네 T자 도로 비탈길로 갔다.

그 비탈을 내려가본 사람이 00동 7세들 사이에서 손에 꼽기도 했고, 그리고 짐작했겠지만 내가 바로 그 손가락에 드는 "그 애들" 중 한명이었으니까.


유치원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꽤 우두머리(?) 축에 속했다.  지금도, 어렸을 때도 관종이었던데다 명예 이런 거에 뜨거운 6살 심장이 뛰었기에, 쬐끄만한 무서움이나 겁 이런 것들이 비집고 나올 틈이 없었다. (허세)


"우와우와"소리를 들으며 또래 집단의 부러움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는 건, 꽤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동네를 주름잡던 쁘띠 스라소니 도장쿠폰 주니어

비탈은 좁은 골목길이었고 그 끝은 차가 다니던 2차선 도로였다.

나는 갤러리들을 언덕 위에 남겨두고 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는 가속이 붙어 더이상 페달의 속도를 다리로 따라잡을 수 없을 때, 페달에서 두 발을 떼어 핸들 쪽으로 V자를 만들어 미친듯한 속도로 내려갔다.


경사의 끝, 도로에 가까워지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때 하얀색 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어렸을 때 기억은 잘 떠올리지 못하는 데, 저 때.

흰색 엘란트라와 내 자전거가 부딪혀서 날아가는 그 순간만큼은 지금도 기억한다. 아픔보다는 놀람이 더 컸다. 내 작은 자전거는 승용차 밑으로 빨려들어가듯 부딪혔고 그 반동에 날다시피 튕겨나간 그 순간, 정말 슬로우 모션이 걸렸다. 흰색 엘란트라 속 운전석에 눈을 질끈 감은 아저씨부터 그 주변 가게간판, 사람들까지 주변이 선명하게 보이다 그 후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 천장이었고 턱 밑을 몇 바늘을 꼬맸다고 했다. 근데 너무 신기한 게, 진짜 딱 안보이는 턱 밑 뼈를 따라서 길죽하게 찢어져서 얼굴에 생긴 흉터인데도 잘 보이지 않는다.

후후 하늘이 나를 돕는다 도와~~ (철없는 소리) 그래도 한동안 아파서 엄청 칭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과산화수소수,, 알싸하고 따가운 알콜 솜,, 빨간 약,, 너무너무 싫어 ㅠㅠ


그렇게 다치고 나서도 나는 우리집이 이사를 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 경사진 도로에 가서 자전거를 탔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다고 그렇게 찾아간건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지금은 아래가 비치는 다리 위에서 혹시나 무너질까봐 철근만 밟고 다니는데 말이다. 물론 빠르게 내려가는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는 지금도 좋아한다.





글을 쓰고 보니 확신이 생겼다.


지금 내가 이렇게 쫄보가 된 이유,

물론 나이도 먹고 그냥 세상만사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최고인 걸 알아버려서도 있지만, 역시 수백 번의 점프와 뛰어내림, 초등학교 정글짐 꼭대기를 와다다다 뛰어다니는 우리 집 제일가는 트러블 메이커의 역할에 충실하느라 그렇다.





용감함 총량 보존의 법칙, 내 용기는 어린 시절에 거의 다 당겨서 쓴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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