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설맞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고
작년 연예대상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고 말한 개그맨 김구라. 그처럼 2018년 추석 즈음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된 교수가 있다. SNS상에서 한 칼럼이 화제가 되며 그 칼럼을 작성한 교수까지 같이 유명세를 얻으며 칼럼계의 아이돌로 등극한 것이다. 바로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민이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에서 발췌
<추석이란 무엇인가>란 불편한 질문을 하는 친척에게 도리어 그 질문의 본질을 되물으라는 내용이다. 명절만 되면 청문회, 압박면접급에 질문을 쏟아내는 친척들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본질을 다시 되물으라고 김영민 교수는 말한다. 부분만 인용하여 전문의 유쾌함이 떨어지니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전문을 읽기를 추천한다.
우아한 농담을 잘 구사하는 김영민 교수의 칼럼을 모아놓은 책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이다. ‘교수의 칼럼’이라니. 두 단어의 조합만으로 굉장히 따분하고 지루할 것 같고, 우리네 대학시절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며 눈이 감겨온다. 요즘 소위 말하는 ‘나 때는 말이야!’식의 가르치기나 ‘요즘 것들은 노-력이 부족해!’라고 말하며 청년층의 열정을 탓하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지향점과 정반대에 있는 책이다. 그는 그의 시대의 기준을 지금의 청춘에게 들이대지 않는다. 그가 경험한 20대와 지금의 20대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조언하지도 않는다. 꼰대들은 모르는 비밀, 조언은 권력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김영민 교수는 단지 이야기할 뿐이다. 일상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대화에서, 영화에서 얻은 통찰을 얘기한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철학을 들려준다. 그러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다. 굴소스 같은 그의 유머는 죽음, 삶, 결혼, 학업이라는 주제에도 감칠맛을 내며 독자가 쉬이 글을 읽게 해 준다.
적당히 염세적이면서 톡톡 튀는 문체가 이 책의 특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문체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눈으로 읽고 입으로 곱씹어보며 웃음을 머금은 채 책을 읽었다. '시니컬한 고학력자의 배운 개그란 이런 것인가?'를 생각하며 판소리같이 해학적인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나와 같은 개그코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대중교통에서 읽다가 혼자 피식피식 웃어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그 어느 때보다 세대 간 담론이 두드러지는 요즘, 꼰대와 밀레니얼이라는 키워드는 각종 트렌드 보고서와 신문 기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출판계에서도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하는 책들을 내고 있다. 기업에서는 밀레니얼 공부하기에 두 팔 걷고 나섰다. 회사 임원들은 ‘90년생이 온다’를 읽으며 신조어 몇 개 정도 외웠다고 밀레니얼 세대를 다 안다고 생각한다. ‘tmi’, ‘얼죽아’ 같은 줄임말 몇 개를 안다고 밀레니얼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할까? 천만의 말씀. 그들은 그저 내가 이만큼 꼰대가 아니고 젊은이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어른이다라는 본인의 모습에 취했을 뿐이다. 그 신조어가 왜 탄생했으며, 왜 밀레니얼 세대가 그것에 열광하게 됐는지 그 백그라운드, 뒷단의 이야기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한 근원적인 성질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탐구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복장의 자율화, 직급 호칭 폐지 등 여러 가지 제도를 도입해 밀레니얼 세대를 수용하려는 흉내로는 절대 혁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친구들과 가장 경계하는 본인의 모습이 뭐냐는 주제로 대화한 적이 있다. 어떤 친구가 꼰대가 되어서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하고 도태될 자신의 모습을 경계한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지. 나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꼰대의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고 있진 않는지, 나도 먼 미래에 “나 때는 말이야?”를 접두사로 붙이며 후배에게 조언으로 위장한 으름장을 두는 것은 아닐런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어른으로 살아야 할까. 어른이란 무엇인지,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지 생각을 해봤다. 좋은 어른이란 닮고 싶고, 존경의 마음이 드는 멘토라고 생각했고, 대답은 결국 이 책의 저자인 김영민 교수였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성세대, 어른의 모습은 김영민 교수다. 밀레니얼 세대가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크게는 사회에서 만나고 싶은 기성세대란 이런 모습이다. 즉, 90년생과 진정한 소통을 하고 싶다면 신조어를 외울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해본다.
새해를 맞아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온 구절과 2020년 나의 새해 목표를 쓰며 마무리한다.
2020년 새해에 나의 계획은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내 유일한 계획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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