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를 찾는 게 취미 1st.
궁둥이에 좀이 쑤셔 죽을 것만 같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이 이렇게나 길었었나? 약속 하나 없는 주말이 소중하기는커녕 이렇게나 무료했었나? 싶은 몇 주가 지나고 있다.
사람들은 만 번쯤은 쉼 없이 저어야 완성할 수 있는 달고나 커피를 만들며 즐거워하고 넷플릭스, 왓챠와 같은 OTT 서비스에 더욱 몰입하며 나름 슬기롭게 강제 칩거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나라고 뭐 별 수 있나.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그리고 티빙까지 모든 국내 OTT를 섭렵 중이다. 아- 그러나 넷플릭스 어언 4년 차, 이제는 무얼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추천받은 시리즈도 두둥-하는 넷플릭스 시그니처 화면만 보다 꺼버리게 된다. 다른 플랫폼이라고 다를 게 있나. 그저 시작 몇 분만 보다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게 되더라.
전직장명함의 이북리더기 찬양글에 홀린 듯이 결제한 크레마로 책도 몇 권 읽었더랬다. 참 부끄럽게도 오랜만에 대량의 활자를 뇌에 입력하려니 뇌에 과부하가 걸린 듯 몇 권 읽고 방치 중에 있다.
어렸을 적 즐겨했던 피포 페인팅이라도 해볼까 하고 이커머스에 피포 페인팅을 검색하니, 아니 이 사람들 나랑 생각하는 게 다 똑같잖아? 눈알 빠질 것 같은 이상한 도안까지 싹 다 품절이더라.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어느 날의 갑작스러운 일념 하에, 무료한 일상은 역시 유료로 바꿔야지 싶어 취미 클래스를 샅샅이 뒤졌다. 그중 눈에 들어온 건 오일파스텔 클래스였는데, 인물 드로잉이나 풍경 드로잉보다 그림 그리기에 재능이 없는 나도 그나마 쉽게 도전해볼 만하게 보였다.
그중 내가 고른 클래스는 마이비스킷의 마음이 편해지는 오일파스텔 풍경 클래스.
많고 많은 오일파스텔 클래스를 중 이 클래스를 고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갬성이 한 움큼 담긴 봉봉오리님만의 스타일
봉봉오리님의 크레파스 봉봉 오일파스텔 튜토리얼 북을 보고 오일파스텔에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미술에 손톱만치도 소질이 없는 내가 활자와 그림만 보고 따라 그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던 도중 봉봉 오리님의 온라인 클래스가 오픈했고! 평소 선생님(?)의 그림 스타일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절호의 기회!
둘째, 그다지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화풍!
타 클래스를 보니, 드로잉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은 스케치부터 실패할 것 같은 그림 스타일이 다수였다. 영상만 보면 참 쉬워 보이지만, 막상 손으로 끄적이는 순간 물밀듯 밀려오는 자괴감에 분명 포기할 것 같았다. 하지만 봉봉오리님의 클래스는 "야 너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어!" 하고 치어업을 해주었달까.
셋째, 타 오일 클래스보다 저렴한 수강료!
클래스 101과 마이비스킷에 있는 오일파스텔 강의 중 가장 저렴했다. 준비물 키트까지 포함해서 12만 원에 결제했는데, 타 강의와 비교했을 때 압도적이었다. 가성비 넘치는 취미 생활을 즐기는 나에게는 굉장한 셀링 포인트였지.(사실 세 번째 이유가 가장 컸다.)
준비물 키트는 주문 후 워크데이 기준 이틀 만에 도착했다.
문교 오일파스텔, 캔버스, 색연필 몇 자루 그리고 지우개 두 개가 들어있었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봐야지.
참고로 어른의 좋은 점은, 음주 수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날 좋은 토요일 점심, 와인 한 잔과 그림이라... 몽마르트르 언덕의 화가들이 이런 기분인가.
랩탑으로 영상 틀어 놓고 한 손에는 연필을 쥐고 있으니, 고등학교 시절 인강 들으면서 공부하던 생각도 나고... 여러모로 생경했다.
스케치를 먼저 해야 하는데 여기서 살짝 멘붕 아닌 멘붕이 왔다. 제대로 연필 잡아 본 것도 꽤나 아득한데, 그림을 그리라고..? 이게 맞는 건지,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꽤나 헤맸다.
스케치가 완성되면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색을 칠하면 된다. 뭐 예술에 정해진 틀이 어딨겠냐고, 내가 원하는 느낌으로 적당히 칠해주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하자. 클래스 명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오일파스텔 풍경이던데, 하나하나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질 것 같더라.
욕심 내서 A5 컨버스 꽉 채워서 그려봤는데, 선생님이 엽서 사이즈로 그리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거 꽤나 진 빠지는 작업이다.
그래도 내가 완성한 그림을 보고 있으니, 그릴 때는 이렇게 하는 거 맞아? 망한 것 같은데? 하고 끊임없이 의심했던 게 풀리더라.
근데 이 정도면 꽤 잘 그린 것 같은데?
갑자기 내가 그린 그림에 애정이 솟구쳐서 냉장고에도 붙여보고, 벽 한쪽에도 붙여봤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름 꾸준히 정기적으로 다양한 클래스를 들으러 다녔는데 생각해보니 드로잉 클래스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색연필도 써보고 처음 보는 재료인 오일파스텔도 써보니 재미있고 신기하더라. 두 시간 동안 그림 두 점 그리니 온 몸에 진이 빠져 남은 오후를 낮잠으로 보낸 건 비밀이지만(....)
다음 주말 햇빛 좋은 날, 때껄룩님의 플레이리스트와 좋아하는 음료 한 잔 옆에 두고 클로드 모네 혹은 폴 세잔 빙의해서 그림 한 번 그려보는 건 어떨까? 약간의 유료로 무료한 삶이 풀리는데, 꽤나 가치 있는 서비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