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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랍 Sep 14. 2022

새벽녘 집 정리

이따금 찾아오는 불면의 밤을 보내는 날이면 긴 밤을 보내기 위해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집 청소를 시작하곤 한다. 밤 중에 할 수 있는 수많은 일 중 하필 집 청소를 하는 이유는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에 내가 할 수 있는 그나마 생산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늦은 밤 먹는 야식은 다음 날 후회와 부은 얼굴을 남기고, 끝없는 음악 재생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만 만든다. 영화나 넷플릭스를 보는 일은 무슨 영화를 보고 싶은지 고민하다 시간을 다 보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이기에 포기한 지 오래고, 책 읽기는 언제나 해야겠다는 다짐만 할 뿐 해내지 못하는 새해 다짐과 같은 일이다.      


그러니 결국 당장 할 수 있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결론이 나는 일은 집 청소밖에 남지 않는다. 낮과 저녁 시간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내팽개쳐둔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버리는 일을 시작하면 가끔은 조금이라도 미리 물건들을 정리해두지 않은 과거의 나를 원망하기도 한다.      


조금은 피곤하지만 잠들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집 청소는 다소 충동적인 부분이 있기에 신중하게 정리 목표를 정해야 한다. 만약 짧은 생각으로 나중에 꼭 쓸일이 있던 것을 버려선 안 되기에 내가 오랫동안 ‘저건 한번 날 잡고 치워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본다.      


가장 만만한 것은 책상 정리다. 책상 위에 있는 수많은 물건들 중 버려야 할 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지만 늘 혼란스러운 상태이기에 주기적인 정리가 없으면 책상 위는 어느새 아수라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가간 책상 위에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의 명함과 어디서 받은 것인지 모르겠을 출력물들, 무심히 벗어둔 마스크들이 모여있다. 이들을 하나씩 버려내는 일이 그날의 새벽녘 집청소 목표가 된다.      


어느 날이었다. 책상을 정리하던 중 책상 옆 책장에서 어떤 물건 하나가 떨어졌다. 그건 오래전에 사서 조립해두었던 배 모형이었다. 만화에 나오는 배를 내 방에 둔다는 것이 두근거렸기에 오랫동안 열심히 조립했던 기억이 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배는 몇 번의 사고를 겪으며 이미 이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뱃머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배의 상징이 그려져 있던 돛도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은 그저 이것이 배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정도의 테두리 정도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배 모형을 한참을 바라봤다. 나는 왜 이 배를 버리지 못했을까.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모형도 아니었고, 그렇게 애정 어리게 관리했던 물건도 아니었다. 다만 그 배는 어떤 사람과의 추억이 담겨있는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배를 버리는 일은 어쩌면 거기에 담기는 기억도 함께 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 때문에 나는 다 부서진 모형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청소를 시작한 그 날은 어떤 결심이 섰던 것인지 과감하게 부서졌지만 그대로 두었던 모형을 버려야 할 것들 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다른 물건을 놓았다. 배가 사라진 자리의 흔적은 곧 사라졌다.    

  

책상 정리 이외에도 옷장을 가득 채운 옷들을 버리는 일이나 더 이상 쓸 수 없는 조명들을 버리는 일을 하다 보면 부서진 배를 버릴 때와 같은 상황이 여러 번 찾아온다. 예전에는 고민하다 결국 버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과감히 버리기 시작했다. 버려야만 지금의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자꾸만 과거의 흔적들을 버려야 함은 너무나 슬프다. 과거에 갇혀서 살아선 안 되지만, 내가 사랑했던 그 무언가들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테고, 결국 이것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을 살기 위해 과거를 버려낸 내가 과거의 나보다 더 빈털터리로 남은 게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버린 만큼 새롭게 채우지 못했다면 미래의 내가 버려야 할 지금의 흔적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지도 모르겠으니 말이다.     


부디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휘감는 허전함을 밀어내고 새로운 것을 들이기 위해 버려내는 풍족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무심히 밝아오는 새벽녘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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