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닌 마에 (いちにんまえ), 이 단어는 1인분이라는 의미인 일본어다. 주로 음식점 등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지만, 일이나 집단 속에서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조금은 낯선 타국의 말을 처음 배운 건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학습만화 중 일본 편을 읽었을 때였다. 한국과 일본의 식문화 차이를 설명하며 마주했던 단어는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의미없는 말 중 하나로 남았다.
그러나 음식점에서나 주로 쓰이는 1인분이라는 말이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단어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1인분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이 적당한 그 무언가에서 꼭 해내야 하는 기준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어느새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고, 서서히 뿌리를 내렸다.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1인분이라는 단어는 내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불안을 자양분 삼아 빠르게 성장했다. 아르바이트, 학교 심지어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내가 해내야 할 몫을 해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게 1인분이라는 단어는 필사적으로 달성해 내야 할 기준이 됐다.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기준점 뒤에 따라붙는 달성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될 거라는 불안감은 어려움보다 더 큰 공포감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1인분이라는 기준점은 무겁고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절대적인 그 무언가에 닿으려는 노력은 결국 나를 번아웃으로 이끌었고, 길고 긴 병원 진료의 시작으로 끝났다.
나를 지배한 필사적인 감정의 문제점은 하나였다. ‘과연 1인분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이 질문처럼 내가 생각하는 1인분은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만 열심히 하면 도달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기준선은 잡을 수 없는 무지개처럼 자꾸만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멀어지는 기준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필사적으로 온 힘을 쥐어짰다.
진료실에서 나는 무수한 질문을 맞이했다. ‘왜 당신은 1인분에 집착하죠? 1인분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래서 도대체 1인분은 무엇일까요?’와 같은 물음들이었다. 나는 마치 꿈에서 마주한 괴물을 설명하듯 하나하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내 머릿속을 감싸던 괴물의 모습을 더욱 세밀하게 볼 수 있었다.
1인분이라는 기준이 뿌리를 내리며 머금은 불안은 바로 ‘거절’이었다. 상상 속에서 1인분에 도달하지 못하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일이었다.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 버림받은 자가 되는 일은 나는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임을 말했고, 더 이상 나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까지 이어졌다. 그렇기에 나에게 1인분을 해내는 일은 내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것과 같았다.
명확하지 않은 1인분에 대한 집착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생각의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내가 1인분을 해내지 못했으니 상대가 나를 떠난 것이라는 자책감은 뿌리를 타고 올라와 머릿속을 뒤덮었다. 모호한 기준은 늘 나를 불안하게 했고, 모든 관계에서 필사적으로 만들었다.
이런 내게 의사 선생님은 물었다. “00씨에게 다른 사람은 어떤가요? 그들이 조금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민폐라고 생각하고 버리고 싶어지나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느끼는 것들은 비슷해요. 00씨가 생각하는 1인분을 달성하지 못해도 쉽게 00씨와의 관계를 다시 고민하지 않아요. 이런 점을 떠올리면 좋겠어요. 본인이 남에게 관대한 만큼 스스로에게도 조금 더 너그러워져야만 불안에 덜 흔들릴 수 있을 거에요.”
물론 아직도 나의 1인분에 대한 강박은 남아있다. 하지만 내가 다 먹을 수 없는 양의 음식이 1인분으로 나왔을 때 숟가락을 내려놓고 정리하듯 마음의 강박도 서서히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남에게 1인분을 해주기 위해 필사적인 것이 아닌 너그러이 내가 쉴 수 있는 1인분의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한 노력을 해보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