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서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있었던 일화다. 그토록 좋아하던 음악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내 모습에 조금 많이 취해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취미로 밴드를 하고 있다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의 밴드 활동에 대해 듣던 중 나는 "재능이 어쩌고"와 같은 말을 했었다. 내 말을 듣던 그 친구는 "이래서 나는 항상 지금 하는 밴드가 그냥 취미일 뿐이라고 여러 번 강조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고작 음악회사에서 일한 지 1년도 안 된 풋내기가 무얼 그리 많이 안다고 밴드에 대해 말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기억의 나쁜 점은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에 남은 건 그저 그때 내가 경솔했고, 그로 인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는 정도다.
취미로 밴드를 하던 친구의 마음이나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듣지도 않으려 했다니. 모르면 듣기라도 해야 했었는데, 어설프게 알고 있으면서 귀도 닫고 있었다는 점을 반성했다. 이후 나는 언제라도 귀를 열어두려 노력했지만, 언제라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멋대로 말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늘 나를 따라다녔다.
그렇다면 잘 아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얼마나 알아야 상대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나에 대한 것들이 내가 가장 잘 아는 그 무엇이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그렇게 나는 내가 겪은 그 무엇들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적었고,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조심스러움과는 반대로 나에 대한 말들이 서투르게 날아들 때가 있다. 최대한 웃음으로 무마시키며 상황을 넘기는 일에 집중하려 했지만, 어떤 날은 기어코 날아든 말이 내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아마도 나도 나를 잘 모를 지경이던 때 더 많이 상처받았고, 더 크게 흔들렸었다.
내가 어떤 방향을 가고 싶은지 나도 모르던 때, 어떤 마음으로 선택을 했었는지 모르던 때 날아들던 “너는 ~한마음에서 했을 거야”라던지 “너는 ~~하고 싶었으니 그랬겠지”와 같은 말이나 “넌 00한 사람이잖아, 어울리지 않게 왜 그래?”라는 말들은 언제나 나를 흔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최악은 “너 같은 애들은 늘 ~~하지 않아?”였다.
이런 말들에 너무나 많이 상처받고 흔들렸기에 반발심이 조금은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나는 틈틈이 많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조금 더 잘 알고 말해주고 싶고, 내 서투름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그래서 평소에도 수없이 생각하지만 자주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에게는 뜬금없는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잘 지내?’, ‘밥은 잘 먹었어?’, ‘무탈하지?’와 같은 말들의 뒤에 당신의 일상이 너무나 궁금하고, 더 잘 아는 사람이 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무언의 뜻을 담으며 말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알리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나를 잘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많이 알고 나면 보잘것없는 사람 한 명이 상대 앞에 서 있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나는 나에 대한 말들을 최대한 아끼곤 했다. 그 결과 나는 가끔 모두에게서 동떨어진 섬이 된 기분을 느끼며 끝없는 외로움을 느꼈었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00씨, 미리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어떤 말도 없어서 알 길이 없어서 도와주지 못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쩌면 벽을 세운 건 아무것도 모르는 남이 아닌 알 기회를 주지 않은 내가 아닐까 생각했다.
타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심은 언제나 있다. 남에게 다가가려면 상대도 나와 가까워져야 한다. 나만 혼자 다가가는 것은 진정 가까워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알고 싶은 만큼 나를 상대에게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잘 알지도 못했던 건 또 나였다는 작은 결론을 내려본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욕심이 많으면서도 선뜻 나를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니 서로 조금 더 알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