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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랍 Nov 18. 2022

마감

마감이 언제인지 안다면, 그 끝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면

영화감독보단 김은희 작가 남편으로 유명해진 장항준 감독이 나오는 영상을 보다 멍해진 적이 있다. 소설을 써보려 노력하지만, 결말을 내지 못하는 딸에게 장 감독은 "마감이 없어서 끝을 못내는 거야. 어른들도 똑같이 마감이 없으면 끝내기 힘들어. 그리고 마감을 지켜서 일을 끝내는 사람들이 바로 프로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딸에게 마감을 만들어주기 위해 소설을 출품할 수 있는 청소년 문학 공모전을 추천해줬다는 결말로 장항준 감독과 딸의 이야기는 끝났다.      


나는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완성된 글을 보내야 하는 직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렇기에 매일 눈을 뜨자마자 하는 생각은 "정오에 내야 하는 마감으로 뭘 쓰지?"였다. 이처럼 마감에 쫓기며 사는 내게 마감이 가진 다른 측면을 보는 일은 충격이었다. 마감이 있기에 결과를 낼 수 있는 거라니.      


생각해보면 마감이 있기에 더욱 열심히 움직이곤 했던 것 같다. 단순히 글을 쓰는 일 이외에도 시험 기간 전날에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한다던가, 단체로 하는 프로젝트도 마감 기한이 있기에 어떤 방식으로라도 결과물을 내곤 했다. 눈에 보이는 마감은 없더라도 언제나 우리의 곁에는 어떤 형태의 마감이 항상 곁에 있었다.

      

유통기한도 어찌 보면 하나의 마감이 아니었을까. 어떤 형태로라도 정해진 시간 안에 요리하거나 정해진 대로 쓰지 않으면 더는 쓸 수 없게 되니 말이다. 시간 내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상해버린다는 점은 마감을 넘겨버린 그 무엇들과 유통기한을 넘어선 음식의 같은 부분이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해야 하는 말도 유통기한과 마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만나는 이들에게 마감이 있는 말을 꼭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생일 축하 같은 것이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그날을 넘어가기 전에 해야만 한다. 한 박자 늦게 도착하는 생일 축하는 두근거림과 축하하는 마음보다는 미안함과 머쓱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 속 마주하는 가족들의 기념일과 같은 것들도 때를 맞추지 못하고 늦게 하면 “그것도 몰랐냐?”라는 면박을 마주하기 쉽다.  

    

일상 속 다가오는 마감 말고도 어쩌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감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구별에 잠깐 방문했다 다시 떠나야 하는 방랑객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마지막이 다가온다. 마음이 맞지 않아 관계가 끝이 나거나 다른 여러 이유로 멀어지다 서서히 끝을 향하니까. 결국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감을 두고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삶에서는 프로여야 하는 나는 마감 안에 나와 함께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할까? 마감을 지나서 어떤 것을 전하려 노력하지 않고, 마감 안에 하고 싶었던 것을 모두 해야 하는 것일까. 오히려 마감이 보이는 듯해 서둘렀던 것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 마감을 당겨오는 결과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기도 한다. 비정하기만 한 마감이 꼭 찾아와야만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하고 말이다.     


나와 멀어진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보곤 한다. 하루라도 연락을 하지 않으면 어색했던 이는 이제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를 사람이 됐고, 가장 친하다 자부했던 사람은 내게 상처만을 한가득 주고 멀어지기도 했다. 반대로 이제는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감사하게도 내 곁에 머무르기도 한다. 사람 사이의 마감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관계의 마감 앞에서 나는 끝없이 무력했다. 마감을 앞두고 더 좋은 결과물을 최대한 남기기 위해 발악해보지만, 그 노력을 시작한 시점은 이미 마감이 지난 후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마감을 넘겨버린 마음은 쉽게 상했고, 전하려던 말들은 더는 어떤 의미도 담지 못하고 기능을 잃어버렸다.      


마감이 눈앞에 보인다면, 영원할 것 같던 순간의 끝이 정말 다가온다면 내 삶의 프로인 나는 어떤 결과물을 보여주어야 할까. 그동안 모았던 말들을 골라 전하고, 그동안 당신이 있어 행복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마감을 앞두고 결과물을 내는 일은 나의 몫이지만, 이를 평가하는 부분은 내 영역이 아니기에 더 어렵곤 하다.     


그렇기에 언제나 사람에게서 너무나 많은 행복감을 받은 순간이 찾아오면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곤 한다. 부디 오늘이 마감은 아니길. 아직 나는 좋은 평가를 받을 결과물을 내지 못했으니 조금 더 시간이 있길 바란다고 말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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