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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랍 Jul 01. 2022

내 말투의 고향은 어디인가?

내가 잃어버린 단어들은 어쩌면 내가 이별한 기억들일지도 모른다

가끔 어떤 사람과의 대화를 회상하다 보면 그 사람이 내놓은 단어들로 언제 이야기를 나눴는지 가늠해보곤 한다. 그 사람의 말은 대화 당시 엄청나게 흥행한 드라마 혹은 영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시절 유행했던 밈(meme)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말하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자주 꺼내는 단어들이 정해져 있기에 그 단어들로 대화상대의 마음이나 주변 상황이었는지 헤아려보곤 한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말투와 단어들은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추측하는 도구가 된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단어들로 상대의 마음이나 환경을 추측한 내용을 바탕으로 대화를 맞춰 가다 보면 내 앞의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반대로 단어들을 아무리 조합해봐도 어떤 생각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과의 대화는 너무나 힘들다.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저 사람의 생각과 환경을 상상할 수 없거나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면 오가는 대화 속 단어들은 그저 공허하기만 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나름의 추리를 하다 보면 내가 뱉었던 단어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 뒤에는 내가 무심결에 던진 말들에 부끄러워져서 주워 담을 방법은 없을지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다.      


그러다 보면 이전에 써둔 글을 보는 일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내 생각의 짧음이 글에서 묻어난다거나 그때의 감정이 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말들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그 말들에 다시 고통받기도 한다.     


지금 다시 꺼내 봐도 마음에 드는 단어들과 부끄러워지는 단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내가 떠나온 것들과 아직 함께하고 있는 것들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흔적이 남은 단어는 다시 마주해도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이미 나와는 멀어진 것들의 향기가 남은 말들은 내게서 나온 것이지만 이제는 낯설기만 하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 때도 아마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단어에 담긴 흔적과 향기가 내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거나 이미 떠나온 시기에 머무르는 것들이기에 부끄럽고 불편한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의 말투를 아무리 따라 해도 내가 그 사람과 똑같아질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매력적인 단어는 그 사람이 꺼낸 것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하지만 같은 단어여도 내가 꺼낸 단어는 같은 무게와 향기를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이른바 ‘어른스러운 말투’, ‘매력적인 말투’를 만드는 일이란 어쩌면 끝없이 부끄러운 과거와 이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의 깊이가 얕음을 상대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말에 더 많은 무게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끝없이 과거의 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일 같다.      


과거의 말투들을 돌아보며 내가 이별한 수많은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도망치듯 떠나온 전 직장과 좋아했던 작가의 수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가까웠지만, 이제는 멀어진 수많은 사람의 흔적을 마주해본다.      


내가 사랑했던 것이 많았음을 다시 꺼내어 확인하다 보면 지금 내가 끌어안고 있는 것들과도 언젠가는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 쏟아낸 단어들도 부끄러워질 것이라는 걱정이 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말없이 마음을 전할 수 없고,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일을 할 수 없기에 나는 끝없이 단어를 꺼내야만 한다. 다만 지금 내가 사랑하는 많은 것이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10년 뒤의 내가 봤을 때 지금의 내가 사랑한 것들이 손때 탄 곰 인형 같아 보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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