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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랍 Jul 04. 2022

몰려오는 파도에 버티는 법

아마 8살에서 9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동해안의 어느 해수욕장에서 물놀이하던 나는 갑자기 몰려온 큰 파도에 휩쓸렸다.     


순간 물에 파묻히며 거세게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고, 나는 바다에 가까운 모래사장에 처박혔던 것 같다. 온몸에는 파도에 휩쓸리며 모래에 긁힌 흔적이 남았고, 내가 고꾸라지는 걸 본 아버지는 달려오셨다. 그리고 그날의 물놀이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후 나에게 동해안은 파도가 거세며 언제라도 휩쓸릴 수 있는 바다로 남았다. 시원하고 몸이 뜨는 즐거운 물놀이를 할 공간 아닌 언제라도 나를 집어삼킬 수 있는 무서운 곳으로 말이다.     


아홉 살이 지나고 스물을 지나 서른도 넘어선 시점의 나의 생활에도 가끔 온몸을 집어삼키고 내동댕이치는 파도가 몰려오는 날들이 있다. 어떤 날에는 그 파도가 마치 해일처럼 커 모든 것을 다 휩쓸어가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를 남겨놓기도 한다.     


파도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늘 느껴지는 것은 꼭대기에서 끝없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과 함께 찾아오는 무기력감은 모래에 긁힌 흔적처럼 마음에 상처를 남기곤 했다.     


바다에서 일정히 백사장으로 몰려오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평안했던 바다여도 주기적으로 파도가 치듯, 내가 평범하게 잔잔한 일상을 보내고 있더라도 그 나날들은 언젠가 끝나고 고난이 찾아온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고 나면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일주일, 한 달이 지나가면 불안해진다. ‘과연 이렇게 조용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찾아오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작은 파도라도 오지 않으면 커다란 해일이 기다리다 겨우 안정시킨 내 생활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함께 찾아왔다.  

   

이 생각의 끝은 결국 ‘나는 행복해선 안 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게 만든다. 어려운 일이 찾아오고 조금씩 무너지는 나를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에 밀어 넣는다.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어냈던 날은 아무 일도 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흘러간 시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평범한 시간이었음에도 마음에 남은 불안감을 의사 선생님께 털어놓자 선생님은 차분히 일상의 파도에 대해 설명했다.     


선생님은 “파도가 몰려오는 날엔 힘든 게 당연해요. 어지러우니까 정신도 차리기 힘들고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도 당연해요.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파도는 언젠가 지나간다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어 평안한 일상의 중요성에 대한 말이 이어졌다.     


“유난히 파도가 자주 찾아오는 날들이 있어요. 다른 때보다도 파도가 더 큰 거 같고, 더 많은 상처를 남기는 날들도 있어요. 그런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은 물결이 잔잔한 날을 맞이해도 불안해하기도 해요. 그건 어지러운 날들에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평범한 날들이 어땠는지 잊어버려서 낯설어 하는 거예요.”     


파도에 집어 삼켜진 날들 때문에 평범함이 어떤 것인지 잊어버렸고, 흔들림이 없는 것이 낯설어 불안함이 자꾸 찾아온다는 말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평범함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평범함을 잊어버리면 안 돼요. 우리가 균형감각을 잃어버려선 더 안 돼요. 평안한 날들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쉴 시간을 주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지쳐있는 몸과 마음이 함께 쉬고 회복해야만 나중에 더 큰 파도가 찾아왔을 때 버틸 힘이 생겨요. 그러니까 지금을 불안해하지 말아요. 그러면 언젠가는 파도가 치는 날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버틸 힘이 생길꺼예요.”     


이 말을 끝으로 평범한 어느 날의 진료는 끝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파도가 치지 않는 날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시작했다.      


파도를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한 파도에 비해 나는 한없이 작으니까.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낯선 아홉 살이 아닌 평안함을 기억하는 사람이 됐다는 걸 기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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