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랍 Jul 02. 2022

유난 떠는 소비

마트에 진열된 수많은 제품을 보고 있으면 깊은 고민에 빠지곤 한다. 진열장에 놓인 1+1과 특가 할인 상품, 조금은 비싸지만 내 취향을 저격해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 중에 어떤 것을 카트에 담을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다.

‘가격이냐 취향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속으로 끝없이 되뇌다 결국엔 그날의 지갑 사정과 기분에 맞춰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곤 한다. 집에 도착해 사 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내가 한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다시 돌아보곤 한다.

가끔 특가 할인으로 눈길을 잡아끄는 제품들을 보고 있으면 의심스럽다는 생각부터 하곤 한다. 뉴스에 나오는 경제 전문가들은 항상 물가가 오르고 서민의 삶이 팍팍해진다고 한탄하는데, 내가 마주한 특별 세일 제품이 이 세상에 유일한 할인 제품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까다로운 면접관이 된 것처럼 제품의 모든 것을 뜯어보기 시작한다. 제품을 만든 회사는 논란이 없는지, 용량이 줄어든 것은 아닌지, 이전과 다른 제품을 팔면서 같은 제품인척 소비자를 속이는 것이 아닌지 한참을 검색해보곤 한다.

까다로운 면접을 통과하면 기쁜 마음으로 특가 할인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조금이라도 문제가 발견될 때는 아무런 고민 없이 다른 제품을 찾기 시작한다. 까탈스러운 소비이다.

가끔은 주변에서 까탈스러운 소비를 하는 나에게 “너무 유별난 거 아니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이 어딨다고 그래. 그냥 더 싸고 많이 주는 거 고르면 네가 이득이잖아”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20대의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마주했던 한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약속을 위해 대로변을 걷던 도중 한 무리의 시위대를 마주한 적이 있다. 이들은 한 회사의 잘못된 운영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었다.

아직 여유 시간이 있던 나는 그들이 왜 거리에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해 시위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절박하게 한 회사의 제품을 왜 사서는 안 되는지 설명했다.

시위대 속 한 사람은 “여러분, 저들이 싼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녹아든 수많은 피와 땀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제 가족은 이 회사가 억지로 밀어내기로 가맹점에 넘긴 제품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결국 쓰러졌습니다. 회사는 제 가족에게 끝없는 욕설을 퍼부으며 실적을 요구했고, 밖으로는 착한 가격으로 소비자를 보살피는 이미지를 꾸며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이 회사의 제품을 보고 있으면 제 가족이 흘린 눈물이 생각나고, 피가 묻어있는 것 같아 끔찍합니다. 이건 제 가족만의 일이 아니라 여러분의 피가 묻어있는 제품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저희와 함께 불매운동을 이어가 주세요”라고 울부짖었다.

피가 묻은 물건. 충격적이었다. 술자리에서 인기 아이템이었던 회사의 제품이 어쩌면 누군가의 피로 범벅이 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마주한 그 회사의 제품을 보면 시위대의 목소리가 떠올랐고, 어쩌면 저기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피가 묻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른바 ‘착한’ 가격표를 가렸다.

유난 떠는 소비는 어쩌면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일의 시작일 수 있다. 개인이 회사에 줄 수 있는 피해는 매우 미세할 것이다. 하지만 작은 물방울이 끝없이 떨어지면 결국 커다란 돌도 뚫어내는 것을 보면 이 노력은 결코 작은 게 아닐 것이다.

한때 소비량 1위였던 일본 맥주가 이제는 마시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는 뉴스를 보며 유난 떠는 소비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한다.

유난 떨며 장바구니에 더 비싼 물건을 담는 것은 도덕적 우월감을 위해서도, 내가 당신보다 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저 가격표 뒤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오늘도 마트와 길거리에서 유난 떨며 소비한다.

이전 02화 사탄이 아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