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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랍 Jun 28. 2022

모든 것은 쌍방과실

관계의 끝은 누구 하나만의 잘못으로 오지 않는다.

“선생님, 저는 안 될 사람인가 봐요. 또 모든 걸 제가 망쳐버린 것 같아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정신과 진료실에서 나는 또 울먹이고 있었다.

병원에 오기 일주일 전, 친구 A와 나는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을 시작했고, 작은 문제에서 출발한 감정싸움은 큰 산불이 돼 A와 나의 인간관계 모두를 불태워버렸다.

가끔 다투어도 금방 화해했었던 사이지만, 이번에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과의 관계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말이다. 그동안 있었던 갈등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서로의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으니까.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맞은편의 의사 선생님에게 푸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는 인간관계를 망치는 주범 같아요. 가끔은 제가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가 아닐까 싶어요. 모든 사람의 행복을 빨아먹고 다 불행하게 만드는 게 바로 저 아닐까요? 그러니까 다들 제 곁에서 떠나는 거 아닐까요?”

급기야 이 생각은 전혀 상관없는 관계들에도 번져가고 있었다.

“선생님, 어쩌면 저는 부모님에게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불행만을 안겨다 주는 그런 애물단지. 억지로 가지고 있지만, 늘 불행만을 가져와서 지치는 0점짜리요. 제가 좋아했던 전 연인도 제가 끝없이 가져오는 불행에 질려서 저를 버린 게 아닐까요?”

끝없이 생각을 이어가며 폭주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브레이크를 걸었다. 선생님은 친절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내 생각을 멈추고, 객관적으로 내가 말했던 모든 것들을 해체해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00씨, 정말 00씨가 정말 혼자 잘못해서 관계가 깨진 걸까요? 정말 100% 00씨의 잘못으로 모든 것이 망가진 걸까요? 우리 다시 생각해봐요. 그게 진짜 맞는 말인지.”

선생님은 조근조근 설명을 이어갔다.

“보통 인간관계에서 100% 잘못해서 인연이 끝나는 경우는 드물어요. 00씨가 누군가를 때리고 상처주었다던지,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못살게 굴지 않았다면 00씨가 100%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모든 것은 그 관계에 속한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어요.”

끝없이 동요하며 울먹이던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진정되기 시작했다. 계속 이어지는 선생님의 단호한 조언 사이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끊어진 많은 인간관계가 스쳐 갔다.

항상 욕을 하지 말라고 요청했지만, 끝없이 욕을 이어가던 B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멀어진 C,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려하기에 화냈다가 오히려 “너는 그래서 문제야”라는 말을 내뱉고 연락을 끊은 D 등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머릿속의 수많은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진 것을 본 것처럼 선생님은 상담을 이어갔다.

“00씨, 박수도 양 손바닥이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인간관계도 똑같아요. 어느 시점에 한 사람과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에요. 그리고 문제가 벌어진 이후에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것은 00씨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내 잘못이 아니다. 나만의 잘못이 아니다. 이 맒 들은 나를 가둬두고 괴롭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산산조각 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관계에 금이 갔을 때, 한 사람만 노력해서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건강한 관계가 아니에요. 그건 혼자서 노력하는 사람에게 해가 되는 관계에요. 그러니까 사람하고 관계가 끊어진다면 거기엔 00씨의 잘못만이 있는 게 아니라 사이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잡지 않은 상대방 잘못도 있는 거라는 걸 항상 기억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인간관계에 대한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사람하고 관계가 끊어졌을 때, 내 잘못도 있겠지만, 무조건 다 내가 잘못한 거라는 생각은 오늘부터 조금씩 줄여보도록 노력해요. 00씨는 버림받는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상대가 나를 아프게 한다면 놓아버릴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라는 걸 힘들 때마다 기억하면 좋겠어요.”

스쿼시가 아닌 테니스, 일방과실이 아닌 쌍방과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가 디멘터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며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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