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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희 Feb 22. 2024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4)

의사 진단을 더 믿는가?


새로 부임한 교회는  십자가 철탑에 적벽돌로 쌓아 지은 아담한 예배당과 전임이 8년간 기거했던 흙벽돌, 스레트지붕의 한쪽귀퉁이가 허물어진 구사택(교육관으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지은 지 일 년이 채 안 된 단층짜리 양옥, 새 사택이 있었다.


목회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집다운 사택에 살게 되었다. 전임 목사의 식구 수대로 방이 넷이나 되었다. 다섯 자 장롱과 넉자 장식장, 서랍장, 문갑, 화장대, 더블 침대가 들어가고도 여유로운 안방과 서재, 그리고 작은 방이 둘(아이들 방) 있었고 응접세트가 세팅된 거실, 그리고 여닫이 격자문 주방과 욕실등 너무 만족한 사택이었다.  

이곳, 어디에도 더 이상 지네는 없었다.


때마침, 대구에 사시는 큰 형님이 시간 될 때 다녀가라고  하셨다. 불임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계획하신 듯했다. 그러나 당시 부임한 교회는 할 일이 참 많았다. 기존 예배당 건물의 허가, 교육관의 철거와 건축, 교인간의 분열로 한 마을에 생긴 한 교단 두 개의 교회의 평화와 성장을 도모하는 일 등등.


형님의 제안을 차일피일 미루며 , 산재한 일들에 전심할 때 지리적으로 중간 지역에 이사를 오니, 지인과 동기들이(대부분 목사, 전도사) 올라가며 내려가며  들르곤 하였다. 아들이나 교인을 훈련소에 입소시키러 왔다가 들르는 이들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이 반갑고 고마워서 굳이 사양해도 한사코 접대했다. 최선의 것으로 그들을 대접하려 하였고,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방문객이 어린 후배건, 주변 얻으러 오는 이들이건  직접 식사나 차를 준비해 나누거나 형편 따라서 근처 식당을 지정해 대접했다. 때문에 근처 도움이 필요한 그들 사이엔 후하기로 소문난 목사님 집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기억하고 고마워 한 분들도 있었다.  


우리의 정성에 감사하는 그들에게  욕심부리며 부탁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축복기도였다. - 내가 왜 그토록 축복에 진심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기꺼이 진심을 다해 하나님께 우리 교회와 가정을 위해 복을 빌어 주었다. 특별히 자식을 주시기를 기도해 줬다.

성경 이야기 < 아브라함의 이삭 출산기>와 유사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해마다 갖는 지역 연합집회가  있어서 개 교회마다 시내 큰 교회로 모였다. 우리 교인들도 일찍이 자리를  잡았다. 내 옆엔 백삼세 시모님을 정성을 다해 모신 일로 대통령상을 받았던 노 권사님이 앉으셨다. 설교 중에 강사 목사님이 갑자기  우리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높이셨다. " 하나님의 능력 보다 의사 진단을 더 믿는 것이 참 믿음인가! "

우리 쪽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정확히 내 심장에 꽂히는 말씀이었다. 나는 엉엉 울며 믿음 없음을 부끄러워했다. 한참 동안 회개의 눈물로  씻고 나니 심신이 따뜻해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주일 낮예배시간이었다.

대표기도를 하던 남자 집사님이 갑자기      " 우리 목사님 가정에 옥동자를 주시기를 비옵나이다."하시는 것이었다.  아니, 이런 사적인 기도를 공동체 대표기도자가 드리다니,  황당하기도 했지만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 집사님은 딸을 셋이나 낳았는데도 기어이 네 번째에 아들을 낳아서 우리가 부임 후 맨 처음 심방과 백일 축하 예배를 드렸던 집의  가장이셨다. 부인은 산후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어서  회복되기까지 마음을 다해 섬겼었다. 나는 아들 선호사상에 짓눌려 아들을 낳기까지 감당했을 그 부인 집사님의 심신의 고단함이 측은해서 백일예배 기도 중에 울컥했는데 그들은 무자한 나의 설움으로 여기고 그런 대표기도까지  하기에 이르렀나 보았다.

 

한 번은 사택 앞 집에 사는 동갑내기  여전도회장 집사님이  내 태몽을 자기가 꾸었노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런가 하면 ,  폐가 삼분의 일 밖에 기능을 못해서 유난히 연세가 들어 보이시는 팔십 대 어르신 집사님이 꿈 얘기를 하셨다. " 옥동자가 강단으로 기어가며  목사님을 보고  '아빠'라고 하더라".


그리고 그즈음, 우리는 시내에 있는 화원에 들르게 되었다. 예배당 꽃 장식에 필요한 꽃등을  단골로 공급받는 곳이다. 국문과 전공인 주인부부는 학교에서 만났고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꽃을 고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두어 달 달거리가 없다고 했더니 병원엘 한 번 가보라고 했다. 자신도 결혼 후 오 년 만에 첫 아이를  가졌는데  달거리가 없어서 생리불순이겠거니 했다가 혹시나 하고 검사했더니 임신이었다고 했다. 왠지 마음이 끌렸다. 대전에 나가면 한 번 산부인과에 들러볼까?


초초가을, 여름 방학이 끝나자마자 부임 후 첫  등반을 대둔산으로 가게 되었다.  젊은 엄마들로 구성된 여전도회의 친목 모임이었다. 산행 좋아하는 우리 부부가 마다할 리가 없어 기꺼이 동행했다. 흔들 다리도 건넜다. 일행과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그뿐,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정상의 탑까지 일행을 앞세우고 쉬었다가 남편과 천천히 하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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