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이에요

Say something, Say thank you

by 김승희


벼 이삭 쓰다듬는 가을바람에

황금빛으로 고개 숙이는 들녘,

가지마다 붉게 익어가는 감

밤송이가 터져 알을 내놓습니다.


내 인생의 긴 여정을 돌아보면,

내가 이룬 것이라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덕분입니다.


젊은 날, 함께 사역했던 남편 목사님 덕분에

저는 지네가 기어 다니는 사택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았습니다.

남편은 언제나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었고,

험한 바다에서조차 주님의 손을

굳게 붙잡게 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사모로서, 아내로서,

한 인간으로서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대의명분'의 무게에 눌려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

셋째 딸 십 년 만의 임신소식에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사과 궤짝 실어다 주시던

일흔의 아버지 그 속내,

당연하게 여기고 흘려보낸 그 사랑

이제야 가슴을 치고 곡하는 말.

“아버지, 감사합니다”는

시간을 놓치고 허공에 맴돌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흔여섯 어머니 덕분에

저는 여전히 기도의 울타리 안에 삽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모으시는 친정어머니가

저의 마지막 방패요, 은혜의 통로입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 덕분에

저는 아직도 길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자정을 치기 전, 부족한 시간에도

안부를 챙기는 자식의 다정한 목소리,

오늘도 잠자리는 따뜻하고, 자장가는

어미의 기도로 감사와 평안을 노래합니다.



부모님 덕분에 내가 있고,

자식 덕분에 웃음이 있고,

젊은이 덕분에 내일이 희망차며,

어른 세대 덕분에 오늘이 굳게 서 있습니다.


그러니, 제 삶의 언어는 늘 하나였습니다.

"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도 덕분입니다.

내가 지켜낸 것이 아니라,

은혜 덕분입니다.

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붙드심 덕분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를 돌아보며,

저는 다시 고백합니다.


덕분입니다

주님 덕분이고

당신들 덕분입니다.


이웃 덕분에 하루가 따뜻하고,

교회와 사회, 나라와 민족도

누군가의 희생과 수고 덕분에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덕분이라는 말은 결코 아첨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습니다.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할 뿐이지요.


이 말 한마디가

불평을 감사로 바꾸고,

분노를 배려로 바꾸고,

서먹한 마음을 화해로 이끌기도 합니다.




코로나 시절, 우리는 “덕분에 챌린지”를 기억합니다.

하얀 방호복에 땀을 흘리던 의료진에게

국민들이 손을 내밀며 “덕분에”라

고백했을 때,

그 단순한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던지요.

덕분이라는 말이, 사회 전체를 붙잡아 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깊은 바다,

작업 중 잘려나간 손목,

차디찬 파도 위에 흩어지던 희망.


그러나 헬기 날개 소리가

어둠을 갈라 다가왔습니다.

응급조치, 긴급 이송,

하나의 생명을 다시 붙들어 낸 것은

바로 그들의 손길.


해경 덕분입니다.



빗물에 갇힌 차량,

창문을 두드리던 손길은

이미 절망으로 쳐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

불길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이

이번엔 물길을 향해 몸을 던졌습니다.

창문을 깨고, 팔을 뻗어,

운전자를 끌어낸 그 손—


소방관 덕분입니다.



먼 타국,

갇혀 울던 노동자들,

귀국길이 막힌 채 이름조차 잊힐 뻔했을 때,


태극기 그려진 비행기가

하늘길을 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우리를 잊지 않았다”

가슴을 치며 울던 그 고백—


대한민국 덕분입니다.



농부의 굽은 허리,

스승의 교편,

할머니의 기도,

아이의 웃음.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덕분에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돌아와 내게 속삭입니다.


“나 또한 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