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본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철학서나 자기 계발 서적을 좋아하는 제가 고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고전은 이야기로 메시지를 전해주니 더 생각할 거리가 많아 여운이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선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제목 그대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까? 에 대한 질문이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짧은 이야기들로 엮어 있어 있는 책은 다양한 메시지를 주었지만 그중에서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던 에피소드는 대표 타이틀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였는데요.
천국으로 지상으로 내려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중인 천사 미하엘은 현실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답을 3가지 찾아야만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두장이의 집에 오랜 기간 살아가면서 그 해답을 얻고 돌아가게 됩니다.
이제야말로 나는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사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속에 사는 자는 하느님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아무런 조건이나 기대 없이 나눌 때 우리는 그 힘으로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후반으로 갈수록 종교적인 색이 담긴 이야기를 써냈다고 합니다. 단편을 보면서도 하느님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 종교적인 말씀의 색이 짙다고 생각했지만 그리스도적 가르침도 알아갈수록 결국은 요가와 결이 같다고 느낍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사랑을 나눠볼까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아닌 조금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전적으로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변치 않고 영원한 그런 사랑입니다. 신의 사랑이란 다른 이들이 그들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있기를 원하고 또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입니다.
레스터 레븐슨
궁극의 자유를 위한 열쇠의 저자 레스터 레븐슨은 “행복은 내가 사랑하는 능력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사랑받고자 하는 것’ 일뿐이라는 걸 알았다는 깨달음을 전하며 에고 그리고 참 자아,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줍니다.
(레븐슨)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랑이라 칭하는 것은 단지 욕구 혹은 필요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은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이 사람은 나에게 필요가 있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죠. 하지만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소유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희생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에고(Ego)라고 부릅니다.
사랑은 자유롭게 하고 소유는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높은 영적 차원의 사랑에서는 자기희생이란 없습니다.
가두어 두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본성,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 에고가 우리를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게 됩니다.
(레븐슨) 인간들의 사랑은 이기적이지만 신의 사랑은 완전히 자기를 비운 사랑입니다. 자기를 비운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가장 큰 상상보다 훨씬 더 큰 무한한 기쁨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스스로를 모든 존재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과 하나 됨을 알 때 우리는 자신에게 대하듯 다른 이를 대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나를 반대하고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곁에 있는 나의 사람, 나의 가족 그리고 우리에게 적대적인 그 사람도 모두 동등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이 충만하거나 사랑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요가원에서 있었던 일화가 기억납니다. 어느 날, 회원 한 분이 같이 회사에 있는 과장님이 정말 밉다고 했어요. 그분은 그 미움을 너무 극대화 한 나머지 증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지나 얻은 것은 과장님의 실패도 좌절도 아닌 회원 그 자신의 몸에 난 병이었습니다.
만약 회원분이 미움이나 싫음 증오를 인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놓아줬더라면 오히려 감정은 그냥 지나쳐 갔을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을 키워 증오를 낳지 않고 말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증오와 사랑하지 않음이라는 껍질을 벗겨내어 이 무한한 사랑의 존재가 더 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게 하는 것뿐입니다.
아난다마르가 요가에서 다다가 이끄는 명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키르탄 요가와 명상을 하며 만트라 구절을 하나 읊었는데요.
baba nam kevalam
우리 모두는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만트라였습니다.
고요하게 앉아 눈을 감고 좋아하는 장소를 상상했습니다.
몸 하나하나에 의식을 두다가 이내 물방울이 다가왔습니다. 그. 물방울을 저의 몸 구석구석에 닿으며 빛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저의 몸은 빛이 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다리도, 발도, 골반도, 복부도, 그리고 저의 상체, 머리 모두 사라져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내 남은 것은 하나의 빛. 사랑
그때 만트라를 읊었습니다.
baba nam kevalam
우리 모두는 사랑이다.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고 이내 사랑만 남았습니다. 저는 고양되었습니다. 아주 평화로웠고요. 기분도 좋았습니다.
다다는 말했습니다.
결국, 영혼의 욕망은 사랑을 주기를 원하고,
우리 에너지 즉, 높은 의식에 다르면 사랑을 주게 된다고요.
오직 내어주는 것, 사랑
레스터 또한 우리의 본성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문젯거리들은 단지 우리의 본래 타고난 사랑을 가렸기 때문에 나타날 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사랑할 때 우리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사람이 옳다’라는 멋지고 따뜻한 태도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완벽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도 판단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의 에너지로 전달되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에너지를 줌으로써 사랑으로 보답받게 됩니다. 우리는 점점 더 사랑으로 커져나가고 성장할 거예요.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될수록, 우리는 우주의 조화와 더 많이 접하게 되고 우리의 삶은 더욱 환희로 가득하고 더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만, 싸우기도 많이 싸울 겁니다.
사랑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나와 다른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잘 우리는 화를 내거나,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바꾸려고 합니다.
서운함, 미움, 짜증 남, 화가 남 다양한 감정과 함께 말이죠.
그렇게 되면 하루종일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를 잠식하게 됩니다.
자, 다시 한번 레스터 레븐슨의 말을 빌리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증오와 사랑하지 않음이라는 껍질을 벗겨내어 이 무한한 사랑의 존재가 더 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게 하는 것뿐입니다.
가장 먼저 곁에 있는 사람, 그리고 가족에게 사랑 연습을 시작해 봅시다.
당신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눈에서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이해하게 될 때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고 받아들일 때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행복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조화롭게 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온전히 사랑한다면 우리는 지금 완벽하게 행복합니다.
사랑은 온전히 받아들임입니다.
사랑은 온전히 내어줌입니다.
있는 그래도 바라봐 주는 그것은 사랑이고요.
오히려 나의 것을 내어줄 때 우리는 더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오직 “사랑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사랑이 오기 시작할 거예요.
이해할 수 없는 조각조각을 하나씩 내려놓고
그저 눈을 감고 잠깐 호흡에 집중했다가,
자, 이제 우리는 사랑으로 태어나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꾸려 들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을 지금 모습 그대로 존재하도록 받아들여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바꾸려 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에고를 투영하는 것이니까요. 더욱 사랑하게 될수록 우리는 생각을 많이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사랑이 되는 것이 사랑을 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의 것입니다.
우리의 매 순간은 요가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단편적인 요가, 한 시간의 수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충만함을 가득 채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리고 삶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요.
요가를 나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요가를 좋아해 더 깊이 알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 요가를 공부했습니다.
요가를 공부하다 보니, 나눌 기회도 생겼고요.
약 10년간의 수련생활 중 저는 요가를 나누었던 5년 동안 가장 많은 성장을 하였습니다.
혼자서 수련하고 공부하는 것도 아주 멋진 일이지만 요가를 나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행복감이었어요.
내가 배운 것을 나누고, 나눔에서 돌아오는 에너지가 저를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온전한 내어줌 그것은 사랑이었어요.
나눌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은 더욱더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계속 나눔을 실천하고 사랑을 보내며 풍요와 감사로 보답받죠.
그 사랑의 느낌은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멋진 기분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멋진 기분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죠. 멋진 기분을 느끼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바로 그 자신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셈인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 그저 주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요가를 하며 영혼의 충만함을 채우고 있나요?
요가를 하며 사랑을 느끼고 있나요?
사랑을 받고, 영혼을 채우고 우리는 그대로 현실로 가져와 따스한 에너지를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말이죠.
때로는 슬프고, 힘들고, 미움의 감정도
요가를 하며, 명상을 하며, 사색을 하며 모두 흘려보내고 온전히 받아들여 주세요.
그리고 받아들인 그 순간 우리는 사랑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요가를 받아들이고, 요가적 상태가 된 우리는 다시 좋은 에너지를 세상에 나누어 줍시다.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우리의 온전한 우주를 위해서요.
Om Shanti Shanti Shanti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간다.
온전한 사랑은 스스로를 모든 존재와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직 사랑이 충만하거나 사랑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증오와 사랑하지 않음이라는 껍질을 벗겨내어 이 무한한 사랑의 존재가 더 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영혼의 욕망은 사랑을 주기를 원하고, 우리 에너지 즉, 높은 의식에 다르면 사랑을 주게 된다.
우리는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사랑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사랑이 오기 시작한다.
요가적 상태가 된 우리는 사랑 에너지를 세상에 나누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