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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은 받았는데 무슨 약인지를 모르겠다

by 화운

언제부터 인지는 모를, 심지어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경우엔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 건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심장 쪽이 아프니까 내과를 가야하는 것일까? 죽을 듯이 아픈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약국으로 갈까? 그냥 단순히 감기일지도 모르니까 이비인후과로 갈까?

그는 가장 만만한 이비인후과로 갔다. 내과는 원인 불명일수록 더 심도 있는 검사와 진단을 위해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겠지만, 이비인후과는 일단은 처방전을 주고 2주 후에 다시 오라고 할 테니까.

막상 의사 선생님을 마주하고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는 말에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다소 진지하기 보단 그저 오늘 하루 몇 십 번째의 환자를 대하는 듯한 생기 잃은 의사의 표정을 보고 나니 자신의 아픔이 일순간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의사에게 생채기 하나 없어 아픈 곳이 없지만 아픈 것 같다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의사는 지렁이 같은 몇 글자를 쓰고는 처방을 내려주었다.


스트레스성 감기일 수 있으니까 약국가서 약 받아서 드시고 2주 뒤에 다시 한 번 오세요. 여기 이 약은 진통제니까 많이 졸려서 일상생활이 힘들면 반으로 나눠서 드세요.

정확한 아픔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는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흰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와 계산을 한 뒤 약국으로 향했다. 약사가 약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그는 약국에 진열된 무수히 많은 약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중에 나를 위한 약이 있을까. 약사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에 약을 줄 수 있을까. 그저 스트레스성이라는 진단에 의구심이 가득 떠나지 않는 그의 머릿속엔 병균이 자라나고 있는 듯 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진통제도 있으니 나아지겠지.

약사는 하루에 한 번, 식후 30분 전에 약을 복용하라고 했다.

약국을 나와 무언가에 홀린 듯 정처 없이 떠돌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 덧 황혼을 손톱달이 갉아 먹고 있는 밤이었다.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밥 먹고 약을 복용하라는 약사의 말에 따라 냉장고에 먹다 남은 피자 한 조각을 해치웠다. 약간 쉰내와 익숙하지 않은 맛이 나는 것이 피자가 생각보다 오래되었나 보다.

약봉투를 열어보니 하루 한 번의 약이 적지 않았다. 진통제라는 것 빼고 나머지 약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알아도 그에겐 의미가 없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아픔이라는 데 약이 따로 있을까. 속는 셈치고 미지근한 물 한 모금에 약을 탈탈 털어 넣고 삼켰다. 그리고 오래되지 않아 진통제로 인해 금새 잠이 들었다.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아무도 없는 이 방 한 켠에 시계바늘마저 숨죽여 모든 소리가 어둠에 파묻힌 깜깜한 새벽.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고 서랍을 열어 처방 받은 약봉지 하나를 털어 넣었다. 당장의 아픔 보다 이틀 째에 복용해야 하는 약을 또 먹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는 그였다.


며칠 전, 아니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내게 넌 작고 여린 손을 내 불구덩이 같은 이마와 배에 약손이라며 올렸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남은 건 한 번에 삼키기도 힘든 무수한 약봉지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대면하는 듯한 미지근한 물 한 컵 뿐이다.

식은땀과 고열로 사경을 헤매는 지금 이 순간에 불현듯 너가 떠올랐다. 이런 내가 처방전을 어기고 약을 두봉지나 먹은 탓에 마음과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 서는 너가 떠오른 뒤 더욱 오르는 열기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해열제가 처방전에 없었던 탓이라 쓸데 없는 핑계를 떠올려 본다.

한 번 더 미쳐보자고 생각한 그는 서랍 가장 맨 아래 칸 구석에 숨겨두었던 너와의 잔해들을 꺼내 들어 품었다. 흥건한 식은땀에 너의 마지막 손편지가 젖기 시작했다. 식은땀의 악취속에서도 손편지에 스며들었던 네 향기가 황홀히 퍼져 나갔다. 이 또한 약기운에 환각 증세일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이 환각이 진짜였을까. 어둑한 무색무음 속에서 눈을 떠보니 날이 밝아 있었다. 식은땀에 망가진 손편지는 얼룩진 잉크들로 인해 너의 마지막 문장들 마저도 형태를 잃어버렸다.

아직 약봉투에 12일치 약들이 남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 먹는 것이 맞는 처방전이었을까. 불규칙하게 흩어진 손편지 조각들을 보며 그는 하나하나 주워 맞추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충 맞춰진 손편지는 여전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번진 잉크들로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읽힌 희미한 한 문장이 있었고, 이윽고 그는 숨죽여 울부짖었다. 자주 들었던 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창하고 화려하게 멋진 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희미한 한 마디를 읽을 수 있었던 이유. 바로 그녀와 이별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미지근한 한 마디. 정확히 말하자면 차가웠던 그녀의 말에 아직 뜨거웠던 그의 못다한 마음이 섞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미지근한 온기였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지근함이 그를 낫게 하고, 울렸다.


아프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안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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