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 당신이 나를 위해 선물해준 연필 몇개가 고작이었지. 수년이 지나서야 연필을 깎아보았지. 연필깎이가 아닌 칼로 한 껍질씩 다듬으니 못생긴 연필이 나를 향해 날을 세웠네. 무슨 말을 써야 할까. 가장 예리한 심으로 아프지않게 쓰려면. 어떤 글을 써도 될까. 뭉툭한 심으로 면죄를 할 수 있는 그런 거. 이러다간 깎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무엇이든 써보았지. 다만, 하나도 지우지 않으면서. 처음엔 당신을 미워해야 하는 기억들을 사각사각 써내려 갔는데, 새로 연필을 깎으며 짧아질수록 좋은 일들만 쓰고 싶어지는 건 왜인건지. 너무 짧아서 연필을 잡을 수도 없어질 때서야 쓰는 걸 멈추었지. 고마웠다는 말은 끝내 한 번도 쓰지 않았네. 못쓴 건지, 안쓴 건지는 모르겠다. 써야 할까. 잠시나마 나를 살게 해준 고마움을. 쓰지 말아야 할까. 이제 고마울 일은 없으니까. 다행인 걸까. 연필 하나로 끝낼 수 있다는 거. 더 쓰지 않아도 되니 그걸로 괜찮은 걸까. 그래서 연필을 내게 선물로 준거야? 너도 연필로 우리를 썼을까? 아니, 너를 썼을까. 나를 쓰긴 했을까. 글에서 타고 남은 재의 향만 피어오르는 걸 보니 조문객 없는 장례가 끝이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