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운 Oct 04. 2024

내일 풀숲을 벗어나려면

매일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풀들이 내 몸에서 자라난다.

잠을 자고 있으면 온몸에 씨앗이 심어지고, 밤의 달빛과 잡념을 영양분으로 삼아 자라난다. 대체로 아침에 눈을 뜨면 새싹으로 시작하지만, 어떤 날에는 풀숲에 둘러싸여 일어나곤 한다.


이름 따위는 붙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잡초라고 부르기는 싫었다. 내 몸과 마음에서 매일 자라는 것이니, 무성의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이 많을 때면 풀이 더 빠르게, 무성하게 자란다. 심할 때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몸과 마음 구석구석 자라난 풀들을 자르고 베어낸다. 가위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단장하듯 자를 때도 있고, 면도기로 뿌리까지 자르는 심정으로 밀어 버리기도 한다. 씨앗을 뽑아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극심할 때는 밥을 먹지 않기도 했다. 그냥 그런 상상. 밥을 먹으면 불안과 잡념에 영양분을 주는 것 같은 느낌.


잘라내자마자 싹을 틔우는 생각과 마음들이 있다. 아주 가끔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풀들이 눈과 귀를 막으면 잠시 홀로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풀을 자르고 있을 때가 있다. 매일 적지 않게 쌓이는 풀들의 무덤. 농장에서 잡초를 자르면 반드시 따로 버리거나 처리해야 하듯이, 무덤을 치우고 나서야 눈을 붙인다.



추석에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산소에 벌초를 하러 갔다. 아버지가 예초기로 풀을 베면 나는 잘려진 풀들의 허리를 한가득 감싸 안아 밖으로 버렸다.


오랜만에 방문한 산소에는 풀과 작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언제 이 많은 풀들을 잘라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지만, 하나 둘씩 차근차근 잘라내었다.


많다고 해서, 급한 마음에 예초기를 크게 휘두르며 많이 베어내려고 하면 안된다. 자그마한 풀이어도, 한 포기 두 포기 모이면 칼날보다 더 억세고 질긴 작은 나무 줄기가 되어 잘 잘리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욕심을 부리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풀을 잘라야 한다.


억센 풀들을 보며, 그들은 무엇에 뿌리를 박아 이리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하며 잘려나가는 허리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우리에게 필요는 없지만, 그들도 태어난 것들이기에.


예초기 뒤로 쌓여가는 풀들을 한가득 들어올리면 제법 무겁다. 별이 되지 못한 생각들이 하나 둘 쌓이면 주체 못하는 무게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풀들도 모이면 힘겨울 정도로 무거워졌다. 이따금씩 풀들이 삐져 나와 바닥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어느새 그 무성했던 잡초들을 모두 말끔히 아버지와 함께 잘라내고, 뒷정리까지 마무리 하고 나서야 친척들을 불러모아 함께 절을 올리고 내려왔다.


이 날은, 머리 끝까지 나를 덮고 있었던 풀들을 함께 베어낸, 가을바람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몸 이곳 저곳에 베어든 풀들의 진한 향이 코끝에 오래오래 맴돌았다.


며칠이 지나면 금새 풀들은 또 다시 새롭게 자라날 것이다. 언젠가 또 나는 그 풀들을 잘라내야 할 것이다. 무릇, 삶은 어지럽힘과 청소의 반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 때면, 왜 나에게 이런 시련과 고통이 자라나야만 하는지 원망하곤 한다. 그 원망을 이겨내고자 하는 기도는 이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싶다는 마음과, 그 풀들 위를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마음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바오밥나무가 세월이 지나면서 더 견고하고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처럼, 나 또한 끊임없는 번뇌와 기도가 나를 더 커다란 나무로 성장시켜주길 바랐다. 더 단단한 줄기와 가지로 더 큰 태풍과 파도가 몰려와도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지만, 매일 내 몸에서 자라나는 풀들은 나와 함께 성장하면서 더 억세고 질긴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물론, 나는 결국 이 풀들을 잘라내고 빛을 찾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내 키보다 큰 언덕과 산을 마주하는 것처럼, 때로는 빛 한 줄기 스며들지 못하는 풀숲에 홀로 놓여진 것처럼 힘겨울 때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끔은 내 몸에 자라난 풀들이 뿌리를 뻗어 몸을 벗어나 이곳 저곳으로 발을 넓혀 갈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면 자라나고 난 뒤에서야 허겁지겁 뒷처리를 하곤 한다.


홀로 수습하기에 벅찰 때는 낫을 버리고 회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다는 말처럼, 다시 돌아온 곳에는 굵은 줄기로 내 발목을 휘감아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잡는 풀들이 나를 맞이 했다.


매일 풀숲을 걷는 기분. 햇살을 가리는 무성한 잎사귀들과 나를 압도하는 커다란 풀들의 모양은 칼날로 뒤덮인 숲과 같았다. 베어내지 않고 도망치듯 풀숲을 뛰어가면 여린 풀잎에도 쉽게 베여 단풍잎 보다 붉은 상처를 몸에 틔웠다.



행복한 사람들은 나처럼 매일 풀이 자라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풀이 자라나지만, 거뜬히 그 풀들을 잘라내어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시원하게 맞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요즘의 나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질감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행복할 때 흘리는 눈물보다, 여러 의미에서 감동할 때 흘리는 눈물과 억울할 만큼 힘들어서 흘리는 눈물들이 더 많다.


행복도,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곤하고 지칠 때면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도 행복이 될 수 있지만, 가끔은 나에게 나태함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의 시간 속에서 급속도로 성장하는 풀들에 둘러 쌓이기만 한다.


더 나은 삶은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부터 정리하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이 사소한 것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힘들 때가 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그 행복이라는 말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또는 풀들이 너무 우거진 숲을 만들고 있어,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풀숲을 빠져나오지 못할 때면, 그 다음으로 자책감의 늪으로 빠져들곤 한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누가 나의 풀들을 잘라내 주고 구원해줄 수 있을까. 아. 결국은 내가 잘라내야 하는 게 맞지. 그래도. 그런 사람이 살면서 한 명 즈음은 있지 않을까. 나를 감싸는 풀들은 억세고 질긴데 나는 점점 그 안에서 햇볕을 보지 못해 점점 여리고 나약해지는 시든 풀이 되는 것 같은 느낌.


며칠 전에는 홀로 회사에서 늦은 시간 야근을 하고 있었다. 남들은 오랜만에 연휴가 많아서 어떻게 쉴지 고민할 때, 나는 연휴에도 일을 하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쉬려면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밤에, 삼촌에게서 오랜만에 안부 전화가 와서 한두시간을 통화를 했다. 나를 걱정하며 나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셨다.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남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나의 단점들, 나 자신도 외면하고 싶었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졌기 때문이다.



풀들을 더 잘 잘라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의 삶을 벗어나, 더 많은 경험과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기에 부정하지 않았다. 올해 초 한 해를 살아가는 다짐 중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금, 아니 많이 마음이 아팠던 건, 내가 좁은 삶을 살고 있기에 나의 글들이 모두 깊이 없이 단조롭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나의 첫 시집을 읽었을 때도 삼촌은 내가 글을 쓰지 않길 바랐다고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글을 쓰려고 하는 모습과, 글을 쓴다는 행위는 가치가 있기에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전화를 끊고 늦은 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모든 불을 끄고 숨죽여 울었다. 풀들에 둘러싸여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도, 어떻게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할지도,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안아주지도 않을 때, 그런 절박한 순간들마다 나를 살아가게 했던 건 시와 글쓰기였다.


나는 매일 우거진 풀숲에서 소리 없이 소용돌이치는 잡념과 마음들을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는 만큼, 그런 나를 살아가게 해준 글들에 대해 직설적인 혹평을 받았을 때, 잠시 이루어 왔던 내 삶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쓴 글들이 좋은 글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기성 작가분들의 책을 많이 찾아서 읽어보려고 하고, 나의 고집스러운 글 습관을 뜯어 고쳐보려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부족하고 서툰 글들이어도 모두 내 진실된 마음들과 나의 삶들이었기 때문에, 나의 진정성들과 진실된 마음들이 아무것도 아닌 걸로 부정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내 글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도 마음이 아프지만, 이러한 말을 들었을 때 아프면서도, 읽어주었기 때문에 조언을 해준 것이라는 감사함으로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 글이었는데, 요즘은 글을 쓰는 것이,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이 나를 방황하게 하고 있다. 동시에 글을 잘 쓰면 나의 방황이 멈춰지는 것인지, 행복의 질감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지도 궁금해졌다.


집에 돌아온 늦은 밤, 나를 틈새 없이 감싼 풀들을 잘라내지 못한 채 잠에 들었다.

얼마 자지 못하고 새벽에 뛰쳐나오듯 집을 나와 새벽 거리를 걸으며 조금씩 풀들을 걷어내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매일 자라나는 풀들을 어떻게 하면 덜 자라게 할 수 있는지. 잘 잘라내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이러한 고민들도 또 하나의 풀이 되어 자라고 있다.


그럼에도 풀을 매일 잘라내는 것은 멈추지 말아야겠다. 꾸준히 방을 청소하고, 매일 하루에 세 번 양치를 하고, 샤워하며 깨끗하게 관리하듯이, 잡념과 불안, 걱정, 아픔에 대해 이겨내려는 행위도 그만두지 않기로 했다.


내일도 어제가 되지 않으려면, 내일은 풀숲을 벗어나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맞아 풀이 아닌 꽃을 피우려면. 무엇이 되었든 계속 행복해지기 위해 도전하고 노력하고 성장해야 한다.


내일 이 풀숲을 벗어나려면.

내일도 살아가려면.

내일도, 그 다음 내일도, 앞으로도 행복하려면.


작가의 이전글 빗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