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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이 횡단보도를 걸을 때

by 화운

걷고 있는데 멈춰 서 있는 기분.

오래 걸어 발에 물집이 잡혔는데도 굽은 소나무처럼 서 있어 무릎이 아픈 기분.

이 모순덩어리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무른 흙에 짧게 내린 뿌리가 자주 흔들려 넘어져 쓰러지지 않기 위해 걷는 것 같은 날들을 보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허술하게 쌓아 올린 모래성이 물장구로 튀는 방울에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이테는 세월이 흐를수록 겹겹이, 탄탄히 쌓여 불규칙한 동그라미들도 안정된 불확실성을 주는데, 나는 그리다 만 동그라미의 구멍으로 시간들이 새어 나가는 듯 했다.

왜 나이테를 완성하지 못했을까. 잎은 무성함의 축제를 지나 폐막식의 커튼처럼 고개를 숙여가고 있는데, 나의 가지들은 여기저기 뻗어 있기만 하다.

가로수길을 따라 걸으며 나무 한 그루 씩 지나치지 않고 보이지 않은 나이테를 그려보는 요즘이다.


너희들의 가지는 무엇을 향해 뻗었는지.

무성한 잎에는 어떤 감정이 물들어 있는지.

혹시 두터운 몸통속은 비어 있어, 누군가 꽉 안으면 무너지는 것은 아닐지.

나의 말과 행동들, 그 모든 태어나는 것들이 시간에게 보란듯이 무례함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처 없이 텅 빈 배낭을 매고 떠도는 기분이 들어, 무작정 늦은 밤 자주 횡단보도가 보이는 곳마다 걸었다. 자주 신호등의 빨간 불이 걸음을 막았다.

대체로 횡단보도가 나를 안내하는 곳은 치타 같은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지나치는 정글이었다. 광활한 초원을 무리 지어 가로지르는 물소 떼처럼 나를 가로막으며 지나가는 사람들. 무리들. 세상들.

절뚝거리는 사슴처럼 뛰지 못하는 나를 잡아먹으러 오는 맹수들은 없다. 나는 쫒기고 있다. 갈증이 혀끝까지 드리우며 발목을 잡고 있다.


하나 둘 가로등 불빛도 잠에 드는 어느 횡단보도 앞, 폐지를 한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서 있는 건너편의 노인과 마주했다.

초록불이 요란하게 빨리 건너가라고 재촉하듯 반짝거리고, 나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쫒기고 있었지만, 노인은 묵묵히 자신의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서서 뒤를 돌아 노인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불빛에 드리워진 노인과 리어카의 그림자는 마치 횡단보도를 걷는 얼룩말 같았다.

신호등이 격렬하게 깜빡이며 숨을 헐떡이며 나를 부르는 것도 잊은 채, 빨간 불이 켜지고 황소 같은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나를 일깨우고 나서야 거리를 건넜다.

노인은 어디로 갔는지 금새 자취를 감추었다. 터벅터벅 길을 걷다 도저히 걸을 수 없어, 아니 서 있을 수 없어 낡은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노인을 보고 난 뒤의 나의 몸에는 얼룩말처럼 흰줄과 검은줄이 보였다.


나는 무슨 색이었을까. 흰색이었을까. 검은색이었을까.

한 때는 순진하고 순수한 흰색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 잘 살아왔지, 잘 살고 있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다양한 나무들을 지나치면서 나의 몸에는 조금씩 줄무늬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매일 조금씩 그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으니, 지우는 법을 모를 수 밖에.

다시 걸어가다가 마주한 거리의 볼록거울에 나는 피를 흘리고 있는 얼룩말이었다. 선명해진 얼룩무늬 때문에 어설프게 가려진 나를 알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원래 검은 말이지 않았을까. 어둠의 길을 걸으며 광명을 몸에 새기며 태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나는 태초의 나를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지금의 나는 쫒기고 있는 얼룩말이라는 것이다.

이따금씩 감옥에 갇혀 달빛에 비춰진 쇠창살 앞의 내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다시 쉬어야겠다. 조금 넓다란 바위에 걸터 앉았다.


다른 얼룩말들의 무늬는 얼마나 촘촘하게 그려 졌을지 하나둘 내 곁에서 함께 달렸던,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보다 더 커다라면서도 잦은 얼룩무늬를 지닌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 잘 사는지를 계산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던 자신이, 이제는 어떤 선택을 하던 결심했다면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도록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 순간 고민하며 주저하기엔 유한한 시간들이기에, 때로는 신중한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이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에, 선택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가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친구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곱씹을 때마다 조금씩 얼룩무늬가 옅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검은 줄인지, 흰 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껏 어떤 선택을 해야 잘 사는지 깊은 수렁에 빠져 고민에 허우적대는 날들이 많았다. 실패하면 어쩌지. 나의 모든 것이 무너지면 어쩌지. 이뤄가는 것이 쌓일수록 그러한 생각은 많아졌었다.


심할 때는 깊은 파랑에 빠져 몇 달을 허우적대기도 했다.

그러한 극심한 순간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그저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시도해보지 않으면, 해보지 않으면, 걸어보지 않으면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나의 눈에 담기는 것보다 크고 거대해,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다.

모든 것을 눈에 담아내려는 욕심을 내려 놓고, 눈에 보이는 것,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 사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무엇을 쌓아 올려왔는지, 과거에 묶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무엇을 잃을지 두려워 더 걸어가지 못하는 것보다, 해보는 것이 더 많은 것을 탄탄하게 쌓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를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던 무른 흙과 뿌리, 모래성이 부드럽게 찬란히 무너졌다.

그래, 무너지더라도 다시 쌓을 수 있으니까.

무너지기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두렵고 무섭다. 지금까지 나에게 블랙홀 같은 줄무늬를 그은 건 실패한 사랑과 마음들이었으니.

사실, 나를 가장 쉽게 무너뜨리고 부수는 건 마음이다. 나는 당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다가가고 싶은데, 당신에게 나는 그저 행인1이면 어쩌지. 정말 그런 거라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그런 생각들이 촘촘히 줄을 이을 때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섭고, 마음을 주는 것이 두려워지곤 한다. 내가 다가갈수록, 관계에 쉽게 물들어가는 나약한 내가 보이는 것 같아서.

모순적이게도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두려워 나를 죽이면서도, 나를 죽이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걸까.

괜찮은 사람은 줄무늬가 없을까.

다시 횡단보도를 하염없이 걸었다.

저 멀리 자취를 감추었던 노인이 빈 리어카를 끌고 또 다시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다.


초록 불이 켜지고, 우리는 얼룩말이 되어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어간다. 걸어온다. 가까워진다. 스쳐 지나간다.

덜컹 거리는 빈 리어카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발굽을 있는 힘껏 박차며 달려가 리어카에 올라탄다. 노인은 말없이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나아간다.

저 멀리 볼록거울에 비치는 당신과 나는 함께 걸어가고 있다. 당신의 얼룩무늬와 나의 얼룩무늬가 합쳐져 하얀 말이 되고, 이따금씩 검은 말이 되어 걷고 있다.

내가 당신과 같은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당신은 내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헝클어진 나의 신발끈을 다시 매어주며 웃어주었다.

걸어야지. 아프더라도 걸어야지. 걸어보아야 아프지 않을 사랑을, 삶을, 세상을 발견할 수 있지.

얼룩말이 횡단보도를 걸을 때 주저없이 수많은 줄무늬들을 통과할 것이다. 온몸으로. 있는 힘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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