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보냈다. 별다른 걸 하진 않았지만 그 별다르지 않은 것을 쉬는 날에도 하지 않았기에, 다시 했다는 것에서 내게는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휴가였다.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주 생각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을 자거나 무념무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정한 쉼인지, 흑백처럼 어느 한쪽이 맞을 순 없지만, 나에게는 쉼이 어느쪽인지를 알고 싶었다.
글과 독서가 취미인 나에게, 글은 언제나 쉼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 쓰고 싶을수록 펜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나를 위해 소중하고 아끼는 표현을 찾다보면 헤매고 헤매다가 길을 잃어 방황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방황으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우울에서 더 심연으로 들어갔다가 수면으로 빠져나오기 일쑤였다.
작년부터 나를 위해, 나의 쉼을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던 건, 나를 향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하던 시간이었기에 압박감이 아닌 자기절제와 통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취업을 하고나서 하나의 산을 넘었던 것이 뒤를 돌아보니 언덕이 되었을 때,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스스로를 절제하고 통제하지 못하고 압박감에 빠져들었다.
예전에 치열하게 살던 나는 어디에 있는지. 뚜렷한 목표를 향해 밤낮없이 몰두하던 나는 그곳에만 있는지. 지금의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신을 향한 질문은 그림자보다도 짙고, 길게 나를 늘어뜨렸다.
압박감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는 자기애의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팀장님과 면담을 했을 때 처음 알게 된 건, 오히려 자기애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몰아넣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쉽게 말해서, 내가 너무 싫어서, 죽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살기 싫을 때에도, 쉽게 죽음을 결심하지 못하고, 계속 우울에 빠져드는 건 그 내면에 내가 너무 소중해서 지켜주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그 뒤로 내가 나를 내면적으로는 무의식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렇다면, 내 가슴에 흘러넘치는 우울이라는 파랑은, 이 파도는 어떻게 잠재워야 하는 것일까. 나의 바다의 끝은 어디쯤일까. 알고 싶었다.
조금 더 나아간 것이 있다면, 나의 파랑을, 이 우울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더 강렬하듯이, 적당한 그림자가 있어야 아름다움이 더 깃드는 것처럼 온전히 우울은 부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보내냐에 따라 사람은 그 만큼 성장한다고 믿는다. 나는 크고 작은 시퍼런 밤들을 허우적거리며 보내왔지만, 지금까지도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그 우울의 시간들을 보내는 만큼, 나는 조금 더 자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울은 나에게, 나를 위한 몫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시간과 상황에서 우울은 찾아올 것이다. 매년 연말에 일이 휘몰아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보내다가, 연초에 갑자기 여유가 찾아올 때 공허함이 우울 한가득 가져오는 것처럼.
두 번째로 조금 더 나아간 것은, 나의 어두운 파랑을 부끄러워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계속 도망치던 것을 그만둔 것이다. 부끄럽더라도 믿고 싶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은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용기를 조금씩 가지고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나의 마음과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니까. 나의 부끄러움은 생각보다 깊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인들의 격려 뿐만 아니라 충고도 기분 나쁘게 듣지 않고 솔직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 한다.
설령, 그 충고가 더욱 나를 부끄럽고 민망하게 하더라도,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 충고에 감사하며 더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의지로 만들고자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성격상 남들보다 쓸데없이 생각이 많고, 깊게 들어가기 때문에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자주 우울이라는 심연으로 자처하면서 빠져들곤 한다. 남들에겐 내가 평온해보일 수 있지만, 심연에 너무 깊게 들어간 나의 모습은 타인들에게는 격동의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히 타인들이 나의 우울을 알아봐주기를 바라진 않는다. 오히려 나의 우울 때문에 영향을 받아 함께 힘들어할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도, 나의 우울이 부끄러워서다. 나는, 나의 우울을 조금 더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안아주려 한다.
앞으로 함께 가야할 우울이라면, 나를 끝없이 바닥으로 내리는 감정일지라도, 이해해보고 솔직하게 바라보고자 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수없이 많은 파도에 허우적대면서도, 결국 조금씩 성장하며 나아가고 있다.
우울의 몫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슬퍼함으로써 더 괜찮을 수 있는 마음을 조금씩 만들어주는 것까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울에 매몰될 때는 또 다른 파랑을 찾으러 떠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