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미루기만 했던 그림 그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미술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었고, 그저 그림을 좋아하기만 했기에 멀게만 느껴졌다. 동경할수록 멀게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딱 그러한 상황인 것이다.
언제까지 미루고 동경만 할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올해는 진짜로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그려보기로 했다.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샀다. 국어책과 동화책의 삽화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그림체도 좋아하지만, 가장 그려보고 싶은 그림으로 연습해본다면 조금 더 끈기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시절 잡아본 크레파스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어렸을 때는 크레파스 아까운 줄 모르고 거침없이 그리고 색칠하며 손을 더렵혔다. 십년도 훌쩍 지난 지금, 크레파스를 쥐고 그려본 첫 그림은 어딘가 불투명하고, 비어보였다.
크레파스가 아까워서 였을까. 다시 내가 좋아했던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들을 찾아보았다. 짙고 선명하게 그려진 작품들, 때로는 그 선명한 윤곽 안에 불완전한 존재와 마음을 투영하듯이 칠해진 색감.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곧바로 나의 문제점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몇가지의 그림을 조금 더 그려본 후, 직장 동료인 디자이너님에게 부끄러운 습작인 나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사실은 동료에게 몇 번이고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얘기를 한 적이 있었고, 항상 마지막은 무엇이든 그려보아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작심삼일보다도 짧게 다짐만 하다가 처음으로 그림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대생이었던 동료에게 나의 습작은 기특해보였을 것이다.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이 한가득이었지만, 바쁘기 때문에 가장 궁금했던 것만 물어보았다. 문제집을 풀고 해설지를 보는 것처럼 드러나는 오답과 해설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그림의 기초이자 시작은, 더 나아가 그림 뿐만 아니라 예술과 창작의 모든 건, 관찰에서 시작된다는 말이었다. 당연하면서도 당연하게 들리지 않았던 말.
나는 그려보고 싶은 것은 명확하였지만, 그 대상에 대해 얼마나 주의깊고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궁금해하고 파헤쳐보려고 했었는가.
거침없이 일렁이는 파도를 그리고 싶었지만, 파도가 어떻게 밀려오는지 그 형체를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그저 여러가지의 파랑과 흰 물보라가 들이닥치는 형국을 머릿속에 상상하기만 했다. 왜 이 부분에서 물보라가 일어나는지, 왜 이 바다에서는 파도가 더 크게 일으켜지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던, 드러난 윤곽에 대한 생각들.
내가 그렸던 그림들과, 앞으로 그려보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서, 써보고 싶은 글의 소재가 되었던 것들까지, 그 이상으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조금 더 주의깊게 관찰을 해보기 시작했다.
구름은 왜 꼭 몽글몽글한지, 머그컵에 피어오르는 따뜻한 차의 열기는 왜 피어오르는 형체인지 등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질 떄도 있었다. 어려웠던 점은, 세심한 관찰을 통해 더욱 그려보고 싶은 것이 명확해지고, 잘 그려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반대였다.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의 이치를 담은 것처럼, 점점 더 내 눈에 뚜렷해지는 무언가는 보이지 않은 모습들이 나타나면서 다채로워졌다. 간단한 것도 간단해지지 않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한 후에야 간결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매일 수집했던, 내가 좋아하는 그림과 사진들을, 글들을 차찬히 보는 시간이 매일 생겼다. 작품의 형태와 분야는 모두 제각각으로 달랐으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어떻게 그리던, 뚜렷하고 선명한 윤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이 드러나지 않고 채색만으로 표현된 그림이더라도, 나는 그림속 형체를 인지할 수 있었다. 채색이 없는 간결하면서도 복잡한 그림이어도, 윤곽을 인지하면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윤곽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막연하게 라도 어떤 그림을 그려보고자 했던 어느 날, 다른 다채롭고 복잡 미묘한 것들을 뒤로하고, 소재의 윤곽을 먼저 이해하고자 관찰했다. 조명에 비쳐 빛에 흐릿해지는 테두리에서도 윤곽이 드러난다.
그림자가 짙은 면에서도 가려진 윤곽이 선명해진다. 비로소 삐뚤삐둘하고 엉성한 색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잘 것 없었지만 내가 그리고자 했던 그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뒤, 가방을 정리하기 전에 아무것도 쓰여지고 그려지지 않은 백지의 노트를 보았다. 나는 어떤 윤곽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러니까 꿈과 행복에는 선명한 윤곽을 가지고 있을까. 그래야만 할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펜으로 선을 그으며 그려본 무언가가 선과 선이 맞닿아 빈틈이 없어도 윤곽이 선명하다고 볼 수 있을까. 선이 연결되지 않아서 틈이 다분하여도 선명할 수 있을까. 그 이전에,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을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갑자기 찾아온 여유에 방황하던 어느 날, 나는 흐릿해진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오래오래 불투명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과를 그리고 싶어도 그려보면 파인애플이 되는 것 같이 복잡했다.
자연스럽게 나를 다시 관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무엇이고 먹고 싶은 건, 가고 싶은 건, 생각하고 싶고 말하고 싶은 건, 갈피를 못잡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화가들이 그렸던 자화상이나, 어떤 사람에 대한 인물화를 찾아보기도 했다. 작가가 자신을 향해 쓴 글이나, 에세이들을 읽어보면서 관찰했다. 우리는 각자의 선명한 윤곽을 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어떠한 특정하고 뚜렷한 하나의 윤곽이 잡힌 자신을 맞이할 수는 있을까.
지금 당장 목표로 잡은 건, 나는 언제나 모험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흔들리지 않는 뿌리 같은 윤곽의 나를 발견하고, 그 뒤에 바람에 살랑이면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흔들리는 무성한 꽃과 잎을 가진 나무로서 윤곽을 발견하고 싶다는 것이다.
앞으로 쓰는 것보다 지우개를 붙드는 시간이 더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지우개 가루가 언덕을 넘어 산을 이루는 시간이 되더라도, 매일매일 조금씩 나를 관찰하고 그리고 기록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불투명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나의 윤곽을 볼 수 있다면.
희미하더라도 볼 수 있다면.
막연하더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