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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Mar 18. 2021

쓸데없는.zip

 


Q: 위 사진의 정체는?

 A: 2015년 실패작, [쓰레기] 폴더를 캡쳐한 것.





쓸데없이 그런 걸 뭐 하러 해?


이 말처럼 사람 김빠지게 하는 말도 없다. 그 쓸데없는 것이야 말로 가장 나 다운 행동인데 말이다. 쓸모가 있어야만 행동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나를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만든다.


합리적이어야 사고, 대가가 있어야 공부하고, 명분이 있어야 그림을 그렸다. 

뭔가를 살 땐 리뷰를 읽어보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만 샀다. 막연히 그리는 일을 동경했는데, 다들 미대에 가라고 하길래 석고 뎃생을 배웠다. 미대를 졸업한 뒤엔 돈을 많이 번다기에 게임 원화 취업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너무나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선택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정말 내 취향이 있었나? 되짚어 보면 그것은 내 욕망의 언저리 어딘가에는 있었으나, 핵심에서는 빗나간 것들이었다.


'쓸모 있게' 행동해서 내가 얻은 것들을 열거하자면, '디자인보다 합리적인 가격을 선택했기에 절약할 수 있었던 만원도 안 되는 돈.' '그림으로 먹고 살겠다며 팔 년의 시간을 들여 따냈지만, 작가는 커녕 취업도 쥐뿔 안 되는 미대 졸업장.' '학원 내에 구비된 정수기 물 보다도 빨리 갈아치워지는 '선생님' 이라 불리우는 호칭.' 

합리적인 선택이 낳은 결과였다.


반면 쓸데없이 했던 소비, 쓸데없이 했던 행동만큼은 오롯이 나로 남았다.


이유 없이 끌려서 샀던 머리끈의 리본 무늬, 언니와 함께 갔던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 기성품보다 몇 배의 값을 치러 사모은 창작자들의 수제 용품, 돈도 못 버는 주제에 할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하다가 결국 결제하고 말았던 독립 출판 세미나. 그런 것들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되었다. 마음에 드는 리본 끈으로 머리를 묶었다는 것 만으로도 무력한 하루의 시작이 수월해졌고, 좋아하는 소품이 놓여진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무언가가 하고 싶어졌다. 유명한 작가가 되지 못할 바에는 쓸모없고 무의미하다 여겨졌던 나의 그림 실력은 독립출판 세미나에서 참여함으로서 의미를 찾아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왜 그걸 하냐고 물을 만한 것들이었다.


네가 지금 그런 걸 할 때냐, 돈도 없는데, '쓸데없이'


만화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도도 시즈카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여행을 가면 꼭 구두를 산다고. 그런 구두는 그곳에서 밖에 살 수 없는데, 그것을 놓쳐버리고 나면 그와 같은 것은 다시는 살 수 없다고. 여주인공 츠쿠시에게 짝사랑을 고백하라고 설득할 때 했었던 대사였다. 나는 어떤 물건을 사거나 혹은 행동의 선택을 해야 할 때 도도 시즈카의 말을 떠올린다.


지금 이것을 사지 않으면, 다시는 살 수 없다.
지금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냥 지나쳐 갈래?



그냥 지나쳐 가지 못했다면, 비합리적이고 소비라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선택했다면, 그 [쓸데없음]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취향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나라는 존재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는 귀중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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