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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Mar 23. 2021

단팥빵을 사 먹는 마음

초등학교 때 좌우명을 적어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그 당시 아무 생각 없었던 나는 [운명아, 내가 간다. 길을 비켜라!]와 같은 후레시맨 대사 같은 것을 적어간 기억이 난다.

좌우명이라는 것이 자리의 오른쪽에 쇠붙이로 깊게 새겨놓고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 글이었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너무한 숙제가 아니었나 싶다. 겨우 열 살 정도 살아본 사람에게 쇠붙이에 새길 정도의 결심을 찾아오라고 하다니. 아주 작은 것에도 쉽게 반응하고 쉽게 변하는 것이 당연한 나이인데, 그런 마음을 쇠붙이에 새겨서 오래도록 쳐다보게 하는 것은 좀 가혹한 것 같다.


가슴 오른쪽에 명찰을 달고 다닐 무렵에도 나름의 좌우명이 있었다. [나는 무조건 작가가 될 거야. 내가 그린 그림으로 독립해서 밥 벌어먹고 살 거야.]  훌륭한 나를 야무지게 꿈꾸는 것이 좌우명인 줄 알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노력해서 능력을 키우면 나는 완성된 존재가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 같다. 그 역시도 쇠붙이에 새겨놓고 오래도록 지켜볼 결심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좌우명을 나침반 삼아 미대를 가고, 졸업을 하고, 강사로 일을 하고, 그 와중에도 작가를 꿈꾸는 동안 시간은 흘렀다. 그러면서 서서히 글귀가 변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슬프고 초라한 것들이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걸 하느라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하고 싶은 것은 돈이 안 되고, 하기 싫은 것을 참아내는 일이 돈이 된다. 꿈을 좇느라 돈을 안 벌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그냥 무책임한 것이다. 생각으로 그리고 쓴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실제로 쓰고 그린 시간이 짧으면 실력은 결코 늘지 않는다. 나의 쇠붙이에 가득 새겨진 말들 위로 또 다른 말들이 상처처럼 겹쳐 써지는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내 좌우명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꼭 하자]가 되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덜그럭, 걸리는 구절이 있다면 페이지를 꼭 접어둔다. 만약에 빵이 먹고 싶은 기분이라면 그 마음을 무시하지 않고 빵집으로 향한다. 만난 뒤에 마음을 불편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내 인성을 너무 오래 의심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 요즘은 코칭 자격증을 따 볼까? 히는 끌림이 있어서 새해에 도전할 방법을 모색 중이다.


마음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그걸 아는 옛사람들은 쇠붙이에 새겨 넣고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 아닐까?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서 내 삶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게 하고 싶다. 그게 요즘 내 삶의 자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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