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흑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죽어도 경찰들은 조사조차 똑바로 하지 않는다.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때는 백인들이 와서 흑인을 죽이겠다고 공표를 해도 테러리스트라고 불리지 않고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건방진 흑인 남자를 죽이겠다고 백인들이 공표하면 경찰이 그 메세지를 저지 하기는 커녕 집집마다 소식을 알려 준다. 결국 그 마을 흑인 남성들은 음식 더미 사이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그날 밤을 보내야 했다. 어떤 의사는 흑인 입에 손을 넣느니 개 입에 손을 넣겠다고 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던 시절,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의 주인공 마거리트의 이야기를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 혹은 대하 드라마처럼 보여 준다. 이 책을 소설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너무나 생생한 묘사 때문일 것이다.
작가와 오빠는 믿기지 않게도 3살 무렵 기차를 타고 할머니 집으로 오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의 고난은 시작일 뿐이다. 작가는 8살에 의붓아버지의 강간을 당하고 작가의 오빠는 한 백인이 죽인 흑인의 시체를 교도소 입구에 던져넣는것을 억지로 도와주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아무도 그 백인을 체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으로 길가에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넘친다. 주인공의 가족들은 이러한 시대를 감안 했을 때 유복한 축에 드는 사람들이지만 작가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주기에는 너무나 바빴다. 작가의 울타리가 되어주지는 못 했다. 목화밭에서 간식을 팔다가 수퍼마켓을 파는 할머니도, 호텔 벨보이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된 아버지도, 카지노 딜러인 어머니도 다들 작가를 사랑했다. 심지어 외삼촌들은 작가를 강간한 의붓아버지 중 한명을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렸다는 암시도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작가의 삶은 너무 공허해 보였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작가는 너무 외로워서 미쳐버릴 것 같이 보인다. 할머니의 집에서 어머니의 집으로, 다시 할머니의 집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왜인지 너무 슬펐다. 오갈데 없는 곳을 헤메는 두 남매의 모습이 보였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많아도 적을 둘 곳은 없다는 그 마음이 두 남매의 마음에 구멍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책 마지막에는 원치 않게 아이를 낳은 16살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 시련은 끝없이 계속된다. 이 끝없는 고난을 거쳐 마거리트 존슨이라는 소녀는 훗날 미국 사회의 상징인 인물인 마야 안젤루가 된다.
고난을 겪는다고 모두가 위대해지지는 않는다. 대부분 고통으로 정신이 깎여나가기 마련이지만 작가의 삶은 깎일 수록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난다. 그 후에 내놓은 수많은 작품들과 사회운동이 그것이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감히 추측해 보자면 많은 책을 읽으며 영감을 얻어 가능성으로 가득찬 정신과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강한 성품에서 오는 것 같다. 작가는 삶의 그 어떤 것에도 꺾이거나 눈을 돌리지 않는다. 자신의 치부와 무지도 모두 드러낸다. 노래하듯이 터져나오는 삶에 삶을 기록한 이 책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는 새장에 갇혔다는 걸 알게 될 수록 더 힘차게 노래한다. 이러한 삶의 역경은 겪고 이겨낼수록 우리의 삶을 입체적으로 만들게 하고 더 나아가 위대해지게 한다. 우리 안에도 마야 안젤루가 가진 반짝이는 마음들이 있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 속에서 각자 힘차게 노래하는 것. 그것이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