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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awrithink Mar 28. 2018

서른, 시작하기 좋은 나이

영화 '줄리 앤 줄리아'를 본 후의 단상

*이 글은 영화 줄리 앤 줄리아의 감상평입니다. 스포일러 조심!


나도 서른이다

1989년생 뱀띠. 올해 나는 공식적으로 서른이다. 인생은 서른부터 시작이라는 고리타분한 말을 몇십 번이나 들었던 것 같은데, 올해 듣는 이 말은 이상하게 와 닿는다. 몸이 이해하는 기분이랄까? 더불어 많은 고민이 시작되는 나이이다.

 '줄리 앤 줄리아'의 [현재 시점] 주인공, 줄리의 고민도 서른부터 시작되었다.


이름은 줄리 포웰. 루틴 한 삶을 살고 있는 말단 공무원이다.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퇴근 후 다정한 남편과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보내는 시간.

유독 힘들었던 하루를 보낸 줄리는 초콜릿 크림 파이를 만들며 이런 말을 한다.

요리가 왜 좋은지 알아? 직장일은 예측불허인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초코, 설탕, 우유, 노른자를 섞으면 크림이 되거든.
무엇을 만들어도 'masterpiece'라 연신 감탄하는 남편. 그야말로 최고가 아닌가? (출처:네이버 영화)

요리로 간신히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내던 어느 날,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간 줄리는 문득, 소위 '잘 나가는 중인' 친구들과의 거리를 체감한다. 빌딩을 사고, 높은 자리에 진급하며, 파워 블로거로 선전 중인 친구들 사이에서 줄리는 자괴감에 빠진다.

나, 이제 서른인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녀의 때늦은 진로 고민. 정체에 대한 불안으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에게 남편 크리스는 끊임없이 힘을 북돋아주며, 그녀가 열중할 수 있는 '무언가'에 도전해보라 조언한다.


서른의 조심스러운 도전

줄리는 평소 좋아하는, 또 매일 해도 지겹지 않을 것 같은 '요리'를 주제로 택하여, '전설의 셰프'이자 프랑스 요리의 대가 줄리아 차일드의 레시피 약 500여 가지를 365일간 수행하는 챌린지를 블로그에 기록하기로 한다. 영화는 이 시점부터 1950년대 '줄리아 차일드'의 삶, 2000년대 '줄리 포웰'의 삶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줄리아 차일드는 실존 인물로, 르 꼬르동 블루 학교의 최초 여성 입학자이자 60-70년대 미국인들에게 프랑스 요리의 진면모를 알려준 당대 최고의 셰프이다. 그녀의 30대 역시 도전과 시작의 시기였다. 남편 폴의 해외 전배로 자리 잡은 파리. 불어도 서툴고 아는 이도 없었던 그녀는 프랑스 요리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인생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지 않았던가. 줄리와 줄리아의 나날들, 어떤 날은 쓰고 어떤 날은 달디 단.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일상적이라 하면 그렇기도 한 시간들을 마치 바로 옆에서 함께 지켜보는 듯한 관찰자적 시점으로 보여준다. 아무도 보지 않는 메아리 같던 줄리의 글도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읽기 시작하고, 남자 요리사들 사이에서 무시받던 줄리아 역시 끈기와 열정으로 그녀만의 요리 세계를 구축해간다. 


이렇게 두 여자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듯한 이 영화에는 사실 '소금'과 같은 요소가 은근하게 배어있었으니, 다름 아닌 '동반자'라는 존재다.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중하고, 고민하고, 좌절하고, 갈등하는 모든 순간 그 둘의 옆에는 항상 폴과 크리스라는 커다란 버팀목이 존재했다. 소금이나 후추 같은 기본적인 요소가 없이는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없듯이, 그들에게 동반자가 없었더라면 반짝이는 도전이나 두근거리는 시작, 짜릿한 기쁨과 성취의 순간은 다소 싱거운 순간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면 200배는 되지 않을까요?)

영혼의 단짝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줄리아의 반쪽 '폴'. 맞은 편 줄리아를 바라보는 꿀 떨어지는 눈빛 (출처:네이버 영화)


우리네 인생 같은 '뵈프 부르기뇽'

영화의 시작에서 줄리는 '요리가 비교적 정확하기에, 예측 불허한 직장보다 좋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요리는 오히려 예측 불허한 우리 인생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영화의 중반, 꽤 유명한 블로거가 된 줄리는 우연히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 출간을 맡았던 동시대의 출판사 편집장 '주디스'에게 저녁을 대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한껏 부푼 마음으로 그녀는 줄리아 차일드의 상징적 메뉴 '뵈프 부르기뇽(부르고뉴 풍의 소고기 찜)'을 만들지만 찰나의 실수로 요리가 까맣게 타 버린다. 하루 종일 준비했던 좋은 재료, 그리고 두근거리던 마음은 한순간에 허무함의 재처럼 부서져 버린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만든 뵈프 부르기뇽은 성공하지만, 공교롭게 주디스는 줄리의 집에 방문치 못하게 되고 하릴없이 남편 크리스와 단출한 포크를 들지만, 왜인지 고기는 간이 맞지 않았다.


좋은 재료가 내 앞에 있어도, 여러 번 해봤기에 방법을 잘 알고 있어도, 최선을 다했어도,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른 절대 실패하면 안 될 중요한 순간이더라도 뵈프 부르기뇽은 야속하리만치 항상 똑같은 맛을 내주지 않는다. 

고기가 뭉근해질 때까지 참을성 있게 익혀야 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오븐에서 꺼내야 하는 뵈프 부르기뇽처럼 우리 삶도 때로는 충분히 익을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하고, 이 때다 싶을 때 과감히 시작해야 하는, 예측 불허한 요리의 과정 같은 것 아닐까.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줄리아 차일드는 싱크로율 99.9%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매일 아침 뉴스로 접하는 여느 '성공담'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줄리아는 미국이 기억하는 전설의 셰프이자 상징적 인물로 자리 잡았고, 줄리 역시 그녀의 블로그 덕에 뉴욕 타임스의 한 면을 장식한 뒤 끝내 작가 등단의 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을 약간만 틀어보자. 우리가 성공이라는 것의 의미를 너무 높은 이상적인 어떤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이 모든 것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겠지만 일상의 작은 성취를 모두 '성공'이라고 칭할 수 있게 된다면 모든 도전과 시작이 어렵지 않고, 이미 이뤄낸 '성공'도 제법 많지 않을까? 따분한 말이지만,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니까. 


줄리 역시 작가가 됨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었지만, 그 시점을 기준으로 줄리에게는 또 다른 목표와 꿈이 생길 테고, 그것을 위해 다시 고군분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다시 루틴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요리에는 완성이 존재하지만 삶에는 완성이라는 것이 딱히 없다. 계속해서 도전하고, 성취하고, 좌절하고, 또 도전하는 굴레 같은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서른에 의미부여 하기

서른이 되었을 때 사실 큰 느낌이 없었다. 가끔 주변에서 '네가 벌써 서른이야?!' , '너도 이제 좋은 시절 다 갔네~' 하는 말들을 들었을 뿐이다. 서른이라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그렇게 상징적인 것이라면, 기왕 좋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떨까? 나에게 서른은,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나이로 정해놓고 싶다.


줄리 앤 줄리아를 본 다음날,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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