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양으로 모든 것을 단정 짓지 말아요
*영화 'The Shape of water'의 리뷰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일의 뉴스에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차별에 의한 사건,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편견들이 즐비하다.
그 와중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아주 작은 희망은 사랑이라는 가치. 이 가치는 다행히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을 보는 눈을 갖기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게 아니라 애초부터 우리에게 탑재되어있지 않은 ‘신적 능력’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겨우 두 눈이라는 일부를 통해서 전체를 보고, 세상을 읽고, 무언가를 판단한다.
영화 ‘Shape of water’의 주인공 엘라이자는 농아이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으며, 왜소한 체격에 누군가의 눈에 띌 만큼의 수려한 외모를 지니지 않았다.
주변의 오랜 친구 몇을 제외하고는 그녀를 제대로 보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녀를 이해하고 알기 위해선 보이는 것과 듣는 것을 제외해야 하는 일종의 물리 감각적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랜 친구 중 첫 번째 인물은 그녀와 함께 지내는 ‘룸메이트’ 같은 존재 자일스이다. 그는 노인이며, 성소수자이다. 그는 내면의 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맛이 형편없는 프랜차이즈 도넛 가게에 단지 주인과 마음이 잘 맞는다는 이유로 주기적 방문을 불사했으나,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접근 금지 명령을 받는다. 또 다른 오랜 친구는 젤다라는 이름을 가진 흑인 여성이다. 엘라이자와 젤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환경 미화를 하는 이른바 ‘청소부’이다.
이 세 인물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것 만으로 영화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은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세상의 본질과 이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엘라이자는 자신이 일하는 연구소에서 이종(異種)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누게 된다. 아, 사실 이종이라는 시선으로 그들을 보는 것은 관람객뿐일 것이다. 엘라이자의 눈과 인어의 눈에는 서로를 이종으로 인식하는 어떠한 느낌 자체도 없다.
그들은 말할 수 없기에 마음으로 대화를 나눈다. 아니,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기에 말할 필요가 없는 관계일 수도 있다.
엘라이자가 인어와의 사랑을 자일스에게 이야기할 때, 이런 대사를 읊는다.
그의 눈에는, 나의 불완전함이 보이지 않아요.
그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있어요.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오직 그 사람의 본질로만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탑재된 능력이 아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현혹되고, 일상에서 쉽사리 [예쁘다] 혹은 [못 생겼다]라는 잣대로 판단된다. 누군가가 성 소수자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을 인식했던 여태까지의 이미지가 RESET될지도 모른다. 피부색이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와 열로 성별을 가른다.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을 ‘일반인’이라는 그룹에서 제외한다.
우리는 모양(Shape)으로 무언가를 판단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서 본인과 다른 모양을 가진 개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에 특정한 모양이 있는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눈에 콩깍지가 씐다고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불완전한 부분이 내가 메워주고 싶은 것, 때로는 메워주지 않아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한편으로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된다. 온 세상은 그 사람으로 가득 차고, 누군가가 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할지라도 강인한 신뢰의 방패로 극복해나가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허락된 사랑이라는 가치는, 타자(他者)의 모든 것을 본질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능력이자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성’인 ‘인간’과의 애정만을 사랑으로 정의하기엔 그 의미가 턱없이 협소하다.
사랑에는 모양도, 범위도, 그 어떠한 정의도 없다.
타자(他者)를 바라볼 때 두 눈으로, 온 정신으로, 본질로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사랑이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물이라는 매개체로 이어진 엘라이자와 인어는 그 어떠한 방해도 없는 공간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방해가 없는 공간(물)에서 그 누구도 엘라이자를 농아라고, 인어를 징그러운 이종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그 공간에는 오직 사랑만이 존재했다.
인간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불완전한 존재이다.
흔히 사람들은 엘라이자와 같은 사람을 스스로와 구분 지어 ‘나와는 다르고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사실 “불완전이 얼마나 눈에 띄느냐” 정도의 차이, 엄밀히 말하면 사회가 약속한 '불완전'이라는 기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의 정도 차이 일 뿐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다. 인간은 완벽을 쫓지만 애초에 완벽은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그 어떤 편견과 기준도 없이 봐줄 수 있는, 나를 비로소 완성시켜줄 수 있는 반쪽이 필요하고, 반대로 나 자신도 누군가의 반쪽이 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 모두가 그 어떤 방해도 없이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사랑이라는 본질적이고 충만한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