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2021년 2월 10일, ‘상품기획, 그 시작과 끝’이라는 첫 글을 시작으로 오늘 100번째 이야기에 이르렀다. ‘100’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셈을 넘어 여정의 이정표처럼 특별하다. 1부터 멈추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그렇다. 앞으로 200, 나아가 1000번째 글을 쓸 행운을 꿈꿔본다. 우공이산 愚公移山,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기듯, 꾸준히 글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뜻밖의 선물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이런 희망찬 서두와 달리, 오늘의 이야기는 다소 무겁고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는 글이지만, 100번째 글이라는 이정표처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생의 새로운 다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때론 고독을 죽음으로 연계시키곤 한다. 반드시 고독이 죽음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하는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고독’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기분을 언짢게 하거나 또는 고독과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오는 부정적인 기운으로 인해 점점 더 침울해지거나 음절 자체로 인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독과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들 주제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를 더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긍정적인 동기와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Pexels.comⓒ2018 Jeswin Thomas
먼저 ‘고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인간은 누구나 혼자 있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얼마나 혼자 잘 견딜 수 있는가에 달렸다” - 쇼펜하우어
- 불안의 끝에서 쇼펜하우어, 절망의 끝에서 니체, 강용수 저
‘고독(孤獨)’은 ‘외로울 고(孤)’와 ‘홀로 있을 독(獨)’이라는 한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을 뜻한다. 이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과 기운, 그리고 의지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어떻게 혼자서 인생을 살아가야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본래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은 홀로 이 세상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이 세상에 온 손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인간은 홀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쩌면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고독, 즉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유전자가 미리 장착되어 이 세상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용한 밤바다의 파도 소리, 아무도 없는 숲 속의 적막함, 눈 내린 거리의 고요함을 즐기기도 한다. 시끄러운 곳보다 조용한 곳에서 심적 안정감과 평안함을 얻는 것도 이러한 이유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명상을 통해 자아를 관찰하고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는 노력 역시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런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유전자의 이기적인 특성 때문에, 혹은 덕분에 홀로 있는 것에 환대를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는 타인에 의해 강제로 홀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고독이다. 자신이 선택했기에 홀로 남겨질 것을 대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미리 가질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선택으로 인해 홀로 남겨지는 것은 어떠한가. 원인과 과정은 그럴 뿐이지 결과는 같다. 같은 결과를 두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의에 의한 고독은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는 반성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앞날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타의에 의한 고독은 상처뿐이다.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고, 반추와 반성의 시간은 없다. 그저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는 시간이 될 뿐이다. 이 역시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그 시간을 극복해 내면 한 단계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성숙한 인간이란 무엇일까. 성숙하다는 것은 모든 일에 초연한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진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 주관과 편견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세상을 대하는 것이다. 감정의 바다가 태풍이 몰아치듯 요동치지 않고, 잔잔하고 고요한 밤바다처럼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야 외부의 흔들림에도 초연해질 수 있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원인과 과정을 두지만 결과가 같은 것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세가 ‘초연한 고독자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많은 친구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줄어든다. 이는 고독해지는 것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는 뜻일 수 있다. 또한 다르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어릴 때 친구가 많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고독자의 자세를 이미 능숙하게 가지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고독은 일찍 찾아오거나 늦게 찾아온다. 결코 오지 않는 법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고독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혼자이지만 그렇게나 맛있게 밥을 먹는다. 최근에 혼자 밥을 먹더라도 그렇게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는가. 우리는 대개 주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하다 보니, 끼니를 마치 문제 해결하듯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즉 밥을 먹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운동을 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 등은 때로는 부담이고 고된 일이다. 둘이서 하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음에 노여워하거나 싫어하거나 꺼려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상황이 잦아들 것이고 그런 상황이 찾아옴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마치 연습장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연습장이라니 다소 슬픈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일 뿐 괜찮지 않을까 싶다.
흔히 비속어로 “인생은 독고다이”라고들 말한다. 이는 원래 일본어로 ‘특공대(特攻隊)’를 뜻하는 말로, 일본어 발음은 ‘톳코타이(とっこうたい)’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조직과 상관없이 별도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특공대’라 불렀다고 한다(출처: 네이버 일본어사전).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톳코타이’를 ‘특공대’로 바꿔 부른 것도 그렇고 ‘독고다이‘의 앞 두 글자인 ’독고’를 반대로 쓰면 ‘고독’이라고 한 것도 우연치고는 기막힌 맞춤이다. 이를 통해 고독자를 특공대에 비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독은 혼자라서 슬프고 외롭고 처량하고 불쌍한 것이 아니라, 특공대이기 때문이다. 아무나 특공대가 될 수는 없다. 슬픔을 이겨내고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 특공대의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이다. 일당백을 해야 하는 특공대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관문을 거친다고 생각하면 고독을 조금 더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출처: Lummi.aiⓒCayetano Gros
다음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하면 떠오르는 것은 미국 예일대 철학자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교수가 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다. 케이건 교수가 이야기하는 죽음은 이런 것이다. 죽음이란 생명체로써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로, 더 이상의 의식도 경험도 없는 ‘완전한 끝’이라고 한다. 즉,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죽지 않고 불멸의 삶을 사는 것은 좋은가?”라는 질문에 케이건 교수는 영생, 즉 불멸의 삶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답한다. 오히려 유한한 삶이기 때문에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동기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죽음을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박탈 이론’으로 설명한다. 죽음은 삶이 제공하는 좋은 것들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박탈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것이 나쁘다고 본 것이다. 살아 있었다면 누릴 수 있었던 권리가 죽음으로 인해 모두 없어진 상태, 죽음이 모든 것을 빼앗아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죽음 자체가 고통스럽거나 괴로워서 나쁜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앞으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나쁘다는 논리로 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 어차피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즉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는 말로, 삶의 덧없음을 나타낸다. 어차피 가져온 것도 없기 때문에 가져갈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모든 것을 누리고 후회 없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진 것도 없으니 케이건 교수의 ‘박탈 이론’은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 올 때는 어머니의 태(胎)로부터 나와 ‘태어난다’라고 표현하지만, 갈 때는 ‘돌아가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태어나는 것은 어딘가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끝이 왔을 때는 다시 돌아간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여행을 갈 때, ‘여행을 떠난다’라고 하고,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집으로 돌아간다’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실 집이 아닌 것이다. 여행을 온 것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호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집이 아닌 곳이니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다 느낄 수 있는 것이다.(여행에서 별의 별일을 다 겪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 마음이 좀 더 여유로워지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 세상을 사는 것도 여행을 온 것처럼 여유로운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너무 아등바등 살다 보면 ‘희로애락애오욕’ 중에서 ‘노(怒)’만 느낄 뿐이다. 마치 여행을 하듯 살면서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여유롭다는 것은 자신에게 집중하되 주변을 너무 의식하지 않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주변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긴장하게 된다. 긴장하면 예민해지고, 그렇게 되면 다시 ‘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넉넉잡아 인생을 ‘100년’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의 자세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너무나도 슬픈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다. 이를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더 여유롭게 만드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또한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케이건 교수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세에서 꼭 다시 만나자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동기가 된다. 그 메시지를 부숴버리는 것은 누군가의 삶의 약속을 깨는 것과도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죽음이 곧 희망을 이야기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주장과 같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증명되지 않는 주장은 사실이 될 수 없다. 아마도 영원히 주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학자의 주장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 한 개인의 주장보다는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에 충실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다.
‘하루하루 사는 것은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의미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언급한 “인간은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존재”라는 말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선 마치 ‘사는 것이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역설적이게도 죽기 위해서 살고자 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살아내려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한다. 세상에 어떤 것도 허투루 해서 얻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내적 외로움에 기인하는 고독과 외면의 끝인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내면의 끝없는 외로움이 고독을 만들어내고 외적인 조건에 의해 죽음으로 향해가는 인간의 행로가 결국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자신에게 끝나는 양상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 존재의 본질적 순환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인간이 지닌 유한성과 고독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완전한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자기 이해를 통해 깨달아야 하는 바는 케이건 교수가 주장한 끝없는 불멸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삶이기 때문에 삶의 의미가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동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고독과 죽음이 주는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정반대의 순간을 지나 오늘의 삶을 더욱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긍정과 희망이 담긴 의미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