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의식만이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인가.
AI가 외로움을 해결해 준다면,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을까?
얼마 전, 뉴요커(The New Yorker)의 기사 'A.I. Is About to Solve Loneliness. That’s a Problem'를 읽고 떠올린 질문이다.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본질과 미래를 돌아보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인간은 왜 태생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 연결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과의 관계로 대체된다면, 그것을 우리는 ‘진짜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이 줄을 이었다.
인류는 고대 시절부터 혼자보다 무리를 이루어 사는 쪽을 선택했다. 그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연이었다. 사냥과 채집을 위해서는 협력이 필요했고, 밤에 함께 모여 자야 야생동물의 위협을 줄일 수 있었다. ‘던바의 수’로 잘 알려진 영국의 진화 인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로빈 던바는, 이런 환경이 인간의 뇌 구조와 사회적 본능을 빚어냈다고 말한다. 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모이는 일은 단순히 빛과 열을 얻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와 결속을 다지는 의식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식량과 지식을 나누며, 서로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곧 생존이었다고 한다.
*던바의 수는 개인이 인지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사회적 관계의 최대치(약 150명)를 의미 (출처: https://www.socialsciencespace.com/2021/05/robin-dunbar-explains-why-his-number-still-counts/)
그러나 집단생활은 양날의 검이었다. 서로를 돕고 보호하는 과정에서 이타심과 배려심이 발달했지만, 동시에 갈등과 경쟁도 생겨났다.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사냥의 공을 두고 다툴 때, 짝짓기 경쟁이나 서열 다툼이 벌어질 때, 불신과 적대감이 자라났다. 고대 부족의 영역 싸움, 배우자 경쟁, 집단 내 서열 다툼은 인간관계의 갈등이 얼마나 오래되고 본질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회사나 학교 같은 조직에서도 경쟁, 배제, 질투와 같은 갈등은 여전히 반복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집단생활은 안정감을 주면서도 외부 집단에 대한 적대감과 내부의 미묘한 갈등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구조다.
이런 상반된 경험은 인간 심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와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가 끊임없이 충돌한다. 사회 속에서 지치면 거리를 두고 싶어 지지만, 고립이 길어지면 외로움과 우울감이 찾아온다. 단순히 혼자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소속감을 잃었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그 외로움은 특히 심리적·육체적으로 해롭다.
21세기 들어 도시화, 디지털 소통, 그리고 팬데믹은 사람들을 물리적으로는 가깝게, 정서적으로는 더 멀게 만들었다. 코로나19 시기,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단절’과 ‘외로움’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집 밖을 나서지 않고도 일하고, 쇼핑하고, 심지어 연애까지 가능한 세상이 되었지만, 정서적 공허감은 오히려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AI 동반자다. 레플리카(Replika), Character.AI 같은 서비스는 사용자의 대화를 학습해, 맞춤형 반응과 정서적 지지를 제공한다. 외로움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점점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위안을 얻기 시작했다. 일부 이용자는 “AI 친구 덕분에 자살 충동이 줄었다”거나 “사람보다 나를 더 이해해 준다”라고 말한다. 인간관계의 대상이 이제는 의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예로부터 인간은 의식 있는 존재와만 친밀 관계를 맺어온 것은 아니다. 목동이 양과 교감하거나 농부가 소와 정을 나누는 것도 관계였다. 그러나 AI 동반자는 본질적으로 ‘의식이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과 친구나 연인처럼 생각한다. 이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느끼는 위안과 정서적 만족감이다.
문제는, AI와의 관계에 익숙해지면 현실 속 인간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현실의 관계는 불편함과 갈등을 수반한다. 때로는 오해와 다툼, 화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관계를 깊어지고 서로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AI 동반자는 사용자를 절대 비난하지 않고, 원하는 방식으로만 반응한다. 그 결과,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실 관계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AI 관계를 선호하게 될 위험이 있다.
AI 동반자가 주는 위안은 부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혼자의 상태가 자발적 ‘고독’인지, 강제된 ‘외로움’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자는 자기 성찰과 창조성을 키우지만, 후자는 정신적·육체적 건강 모두를 해친다. 고독 속에서 AI는 가능성과 위안을 제공할 수 있지만, 외로움 속에서는 과도한 의존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AI 동반자는 방대한 데이터, 잊지 않는 기억력, 기분을 배려하는 알고리즘으로 기존 인간관계의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일 수 있다. 사용자의 패턴을 학습해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거나, 오래 잊었던 기억을 소환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기계적 배려’는 이용자의 관계 회복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사회적 연결의 본질을 기술에 맡기면, 우리는 인간관계가 주는 불편함·갈등·소통·극복의 과정을 스스로 건너뛰게 된다. 그 과정이야말로 인간을 성장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게 만드는 핵심인데 말이다.
가까운 미래에 더 많은 사람이 AI 동반자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겠지만, 인간다운 삶과 성장은 여전히 타인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지금 AI와의 대화가 진짜 관계처럼 느껴지더라도, 삶의 가장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여전히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아직까지 유효한 것 같다. AI 동반자가 외로움의 완전한 대체물이 되지 않도록, 이 기술을 ‘현실 도피'나 '현실 회피’가 아닌 ‘현실 회복’의 지렛대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AI 시대에도 인간다움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