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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은 과연 지능의 문제일까.

탈출도 지능순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

by 닥터브룩스

우리는 종종 ‘예절은 지능의 문제다’ 혹은 ‘탈출도 지능순이다’와 같은 말을 무심코 내뱉거나 듣곤 한다.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이 표현들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복잡한 현상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 내려 버리는 듯한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말들은 타당한 것일까.

이 무심한 문장들 속에서 시작된 질문은, 지능의 본질을 넘어 인간의 심리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파고드는 깊은 사유의 여정이 되어 버렸다. 먼저, ‘지능’이라는 단어의 껍질을 벗겨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사회는 오랫동안 지능을 학교 성적이나 IQ처럼 단일한 잣대로 측정하고, 그 결과로 한 사람의 가치와 가능성을 재단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인간의 다채로운 능력을 단 하나의 숫자로 환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 지능 이론’이라는 이론을 살펴보면 좋겠다. 이 이론에서 의미하는 지능은 하나의 거대한 수정체가 아니라, 저마다 다른 빛깔을 내는 작은 보석들의 집합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논리수학 지능이나 언어 지능처럼 익숙한 것 외에도, 타인의 감정과 의도를 파악하고 교감하는 ‘대인관계 지능’,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이해하는 ‘자기 성찰 지능’, 주어진 환경과 도구를 활용해 현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실용 지능’,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나 신체, 운동 능력과 같은 수많은 보석과 같은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새롭고 넓어진 관점으로 앞선 문장들을 다시 바라보자, 희미했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지지 않는가. ‘예절이 지능의 문제’라는 말은,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대인관계 지능’의 영역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진정성이 담긴 예절 바른 행동이란, ‘식사 중에 소리 내지 않기’와 같은 규칙의 암기를 넘어서게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 규칙을 읽고,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에서 감정을 헤아리며, 자신의 행동이 관계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는 고도의 인지 활동의 결과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탈출도 지능순’이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위기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제한된 시간과 자원 속에서 최적의 해결책을 창의적으로 구상하며, 예상치 못한 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하여 실행에 옮기는 ‘실용 지능’의 중요성을 꿰뚫는 표현이다. 이처럼 지능을 다차원적 스펙트럼으로 이해할 때, 앞선 속담들은 피상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분석의 도구가 관계의 무기가 될 때, 그 예리함은 종종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당신은 대인관계 지능이 부족하군요”

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두 번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 vs 감정’이라는 초기 가설을 넘어, ‘관찰 vs 판단’이라는 더 정교한 개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예의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관찰을 넘어선 상대의 인격 전체를 겨누는 ‘판단’의 화살이다. 이 화살은 상대방의 마음에 견고한 방어의 벽을 쌓게 하고, 모든 소통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린다. 반면,

“당신이 방금 제 말을 끊었을 때, 저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려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구체적인 ‘관찰’에 기반한 자신의 상태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는 비난이 아닌 대화를 지속하기 위한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 준다. 그렇다면 만약 내 판단이 100% 옳다고 확신한다면 어떨까. 이때조차 섣부른 단정은 위험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말을 빌려 지적 겸손의 가치를 일깨운다. 절대적 확신은 더 나은 진실에 도달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지적 교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자신의 기존 신념을 강화하는 정보만 편향적으로 수집하는 ‘확증 편향’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더닝-크루거 효과’ 같은 인지적 함정들을 보여준다. 결국 강한 확신을 표현하는 가장 성숙한 방법은, ‘나는 무조건 옳다’는 일방적 선언이 아니다. 자신의 논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기꺼이 반론에 귀 기울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절은 과연 지능의 문제일까.png ⓒ 2025


다시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회귀해 보자. 똑똑하지만 무례한 사람도 있고, 학식은 부족하지만 누구보다 현명하게 위기를 헤쳐나가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현실에는 무수한 예외가 존재하는데, 왜 우리는 그토록 쉽게 ‘예절은 지능순’과 같은 단순한 공식에 기대려 하는 것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답은 놀랍게도 그 말이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 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들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강력한 ‘심리적 도구’이자 ‘인지적 지름길(휴리스틱)’이다.


첫째, ‘공정한 세상의 오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 싶은 깊은 욕구가 있다. 세상이 예측 가능하고, 사람들은 각자 마땅한 대가를 치른다고 믿는 것이, 세상이 혼돈과 불공정으로 가득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무례함이나 불행을 ‘지능 부족’이라는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 ‘나는 지능이 있으니 저런 일을 겪지 않을 거야’라는 거짓된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타인을 판단할 때 상황적 맥락보다는 개인의 내적 특성으로 원인을 돌리는 ‘기본적 귀인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저 사람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졌을 가능성을 숙고하기보다는, 그냥 ‘원래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에너지가 적게 들기 때문이다. ‘지능’이라는 단어는 내적 특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처럼 포장해 주는 아주 편리한 라벨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결국, ‘예절은 지능순’이라는 말은 타인을 향한 정확한 분석이라기보다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재단하고, 세상이 공정하고 예측 가능하다고 믿고 싶으며, 타인을 손쉽게 판단하고 싶은 우리 내면의 깊은 욕망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는 점이다.


어쩌면 진정한 지능이란, 세상 모든 것에 명쾌한 답을 내리는 능력이 아님을 깨닫는다.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소크라테스처럼),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는 성숙함(판단에 대한 숙고), 그리고 더 나은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줄 아는 지적 겸손함(진짜 맞는 것인가 하는 고민)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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