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책임이 아닌 공동의 책임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기이한 역설에 부딪히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은 자신의 부재가 누군가에게는 가장 강력한 현존으로 느껴질 때다. 가령, 평소 말수가 극도로 적고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만 유지하는 어떤 극I 유형의 사람이 만약 동료들로부터 "소통하기 힘들다"라는 평가를 받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처럼 보인다.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을 지키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런 어려움이 감지될 수 있다는 말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필요한 최소한의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슈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이런 현상은 비단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타인을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 메커니즘 자체에 깊이 뿌리 박힌 본질적인 오류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흔히 침묵을 소리의 부재, 즉 '0'의 상태로 인식하지만, 존재 자체가 '100'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관계의 역학 속에서 침묵은 결코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고함보다 더 시끄럽고, 명시적인 폭언보다 더 위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거대한 의미의 덩어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누군가의 고요함이 다른 누군가에게 폭력으로 해석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과 뇌, 그리고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먼저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를 빌리도록 하자.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이 명제는 유효하다. 상대방이 나에게 언어를 제공하지 않을 때, 나는 상대방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현상학적으로 볼 때 침묵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해석을 갈구하는 '공백'이다. 왜 침묵하는 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의미가 비어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설계돼 있다. 눈앞에 놓인 텍스트가 모호하거나 상대방이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을 때, 그 공백을 그대로 두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감정, 그리고 선입견으로 채워 넣는다. 그리고 이를 해석학에서는 '선이해'라고 부르는데, 문제는 이 선이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부정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신만의 개인적 경험, 자신만의 언어와 생각, 자신이 이룩해 놓은 문화 속에서 이를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편향이 빠질 위험이 높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통이 없는 대상은 일종의 '블랙박스'와도 같다. 내부를 알 수 없는 이 블랙박스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불안과 두려움을 투사(Projection)한다. 어떻게 보면, 사실 침묵하는 자가 발산한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대상 앞에서 관찰자의 내면이 (자신의 해석에 의해서) 만들어낸 공포가 반사된 결과일 수 있다. 침묵하는 자는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타인에게 "나를 당신 마음대로 해석하시오"라는 무언의 권력을 행사한 셈이 될 수 있고, 이는 역설적으로 '해석의 폭력'을 유발하는 원인을 제공한 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 위에서, 뇌과학과 신경과학은 왜 하필 그 해석이 '강압'과 '공포'로 귀결되는지를 말해 준다. 인간의 뇌, 특히 편도체는 수백만 년 전부터 생존을 위해 진화된 위협 감지 시스템이다. 원시 시대의 숲 속을 상상해 보자.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그것이 바람 소리인지 포식자인지 명확하지 않다면 뇌는 생존을 위해 그것을 무조건 '호랑이', 즉 치명적인 위협으로 간주하도록 설계되었다. 모호함을 안전하게 해석했다가 실제로 위험하다면 목숨을 잃지만, 위험하게 해석했다가 안전하다면 잠깐 놀라고 말 뿐이기 때문이다. 이 오래된 생존 본능은 현대 사회의 사무실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동료의 무표정과 침묵은 뇌의 입장에서 '식별 불가능한 데이터'다. 뇌는 예측 가능성을 선호하고 불확실성을 혐오하는데, 상대가 어떠한 사회적 신호도 보내지 않음으로써 뇌에 지속적인 '예측 오류'를 발생시킨다. 타인의 다음 행동이나 기분을 예측하기 위해 뇌는 과도한 대사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지적 과부하는 곧장 스트레스 반응으로 이어진다. 상대방과 말을 함으로 인해서 상대방의 기분과 의도를 파악하는데, 누군가가 "소통하기 힘들다"라고 호소하는 것은, 사실 "당신의 의도를 시뮬레이션하는 데 내 뇌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어 고통스럽다"는 생물학적 비명에 가깝다. 더욱이 뇌과학적으로 볼 때, 텍스트 위주의 건조한 단답형 대화나 침묵은 목소리의 톤, 리듬, 표정과 같은 '운율적 정보'가 제거되어 있다. 포유류의 뇌는 이러한 비언어적 신호를 통해 상대방의 안전함을 판단하는데, 이것이 제거된 소통은 뇌에게 안전 신호를 주지 못하므로, 무미건조한 팩트 전달조차 공격적인 명령으로 오인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현상을 사회과학과 심리학의 렌즈로 바라본다면, 문제는 '신호'와 '교환'의 실패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날씨 이야기나 점심 메뉴 같은 '스몰 토크'를 생산성 없는 잡담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가 지적했듯, 이러한 교감적 언어(Phatic Communion)는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나는 당신에게 해를 끼칠 의도가 없으며, 우리는 같은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사회적 안전장치다. 즉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관계형성을 위한 언어교환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업무 외적인 대화를 일절 하지 않는 태도는, 이러한 사회적 의례를 거부하는 것으로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사회학적으로 침묵이 종종 권력의 상징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듣고,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설명한다. 따라서 직급과 무관하게 누군가가 침묵을 유지하는 행위는, 의도와 달리 타인에게 무의식적인 '우월감'이나 '거만함'으로 비칠 수 있다. "나는 굳이 너와 친밀감을 쌓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고압적인 시그널로 오독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상호성의 원칙을 따른다. 한쪽은 끊임없이 눈치를 살피며 감정 노동을 제공하는데, 다른 한쪽이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이는 심리적 등가 교환의 법칙을 깨뜨리는 행위다. 이러한 불균형은 상대방에게 무시당하거나 착취당하고 있다는 박탈감을 심어주고, 결국 침묵하는 자를 향한 적대감으로 변모하게 만든다. 심리학의 '기본적 귀인 오류' 역시 이 상황을 악화시킨다.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침묵)을 상황적 요인(내성적인 성격, 바쁜 업무)으로 보지 않고, 기질적 요인(성격이 나쁨, 권위적임)으로 귀인 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보가 없을수록 타인을 단순하고 부정적인 카테고리에 묶어버림으로써 불확실성을 종결지으려 하는 것이 더 적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억울한 오해의 사슬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억울하다고 항변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조직이라는 사회적 공간에서 평판은 실재하는 자본이며, 오해받은 침묵은 '불통'이라는 낙인이 되어 개인의 커리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해결의 실마리는 '자기규정'에 있다. 타인이 나를 오해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자신의 '사용 설명서'를 타인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메타인지적 공개'다. 가령, 업무적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저는 평소에 말수가 적고 결론 위주로 말하는 편입니다. 이는 업무 효율을 위한 것이지, 결코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님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짧은 선언은 뇌과학적으로 상대방의 뇌에 올바른 예측 모델을 심어주는 행위다. 상대가 나의 침묵을 '화남'이 아닌 '원래 성향'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면, 편도체의 경보 시스템은 꺼지고 불필요한 공포감은 사라진다.
또한, '저비용 신호' 전략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성격을 개조하여 수다쟁이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텍스트로 소통할 때 이모티콘을 하나 덧붙이거나,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와 같은 의례적인 인사를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사회적 동물로서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라는 신호를 송출하는 행위다. 마치 맹수가 서로를 마주쳤을 때 으르렁거리지 않고 눈을 깜빡여 적의가 없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이 작은 신호들이 쌓여 신뢰의 완충지대를 형성하면, 그때부터는 짧은 단답형 대화로 '침묵의 불확실함'엣 벗어나 그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논의는 '소통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흔히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이 투영된 허상을 본다. 침묵하는 자에게 악의는 없었을지라도, 그 침묵이 타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소음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무심함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이라는 미지의 행성, 그 깊은 심연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 심연의 공포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침묵조차 누군가에게는 해석해야 할 난해한 텍스트임을 인정하고, 그 텍스트를 읽기 쉽게 만들어주는 친절함을 베푸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통 능력'이다. 오늘 당신의 침묵은 동료에게 어떤 의미로 읽히고 있는가? 혹시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고요함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깊이 고민해 볼 일이다. 타인을 위한 친절한 주석(註釋)을 다는 일,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을 오해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