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틴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흔히 버틴다는 말을 하곤 한다.
“직장에서 버티는 것이 살아남는 것”
“인생에서 버티는 것은 오래 사는 것”
일상적으로 '버틴다'는 말을 자주(?) 주고받곤 한다.
직장에서는 버티는 것이 곧 살아남는 것이라는 격언이 통용되고,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는 버티는 행위 자체가 곧 장수의 비결이자 승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버틴다'라는 단어가 지닌 무게를 우리는 정말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어떤 날은 이 말이 따뜻한 포옹처럼 느껴지다가도, 또 어떤 날은 목에 겨눠진 서늘한 칼날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버텨라'라는 말이 위로의 가면을 쓴 채 우리에게 가해지는 가장 폭력적인 언어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상대가 더 이상 움켜쥘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임에도, 그저 그 자리에 머물라는 요구는 때로 잔인한 강요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를 갉아먹기만 하는 '무작정의 버팀'과 우리를 변화시키는 '전략적 버팀'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존재하는지 말이다.
이를 이해함에 있어서, 감정의 영역을 넘어, 자신이 '가치 창출적 소비의 법칙'이라 부르는 관점으로 버팀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제학이나 물리학에서 소비는 자원의 사용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에너지만을 소모한다면, 그것은 무질서와 낭비로 향하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불과하다. 버팀은 매우 고비용의 정신적 활동이다. 우리의 시간과 감정 노동, 그리고 신체적 건강을 태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소비가 '새로운 도구'나 '새로운 가치'의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버팀은 생존이 아니라 그저 '침식'일 뿐이고 '침몰'에 지나지 않는다. 강물 속의 바위가 자신을 스쳐 가는 물살을 견디고 견디다 결국 모래가 되어 사라지듯, 목적 없는 버팀은 인간을 마모시켜 무(無)로 되돌린다. 즉 갈리고 갈려서 그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버팀은 단순히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재련의 과정'으로 개념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대장간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예리하면서도 결코 부러지지 않는 강한 칼을 만들기 위해, 한 덩이의 철은 담금질이라는 가혹한 순환을 거쳐야 한다. 공포스러울 정도의 고열이 이글거리는 화덕 속에 던져졌다가, 돌연 차가운 물속에 처박히고, 다시 수천 번의 망치질을 견뎌야 한다. 만약 망치질 당하는 '철'이란 놈에게 입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이 과정을 '폭력'이라고 부를 것이다. 철의 입장에서 불길은 습격이고 망치는 트라우마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열기와 충격에 대한 '버팀'이 철의 분자 구조를 재배열한다. 망치질은 불순물을 제거하고 밀도를 높인다. 뜨거워지고 차가워지며 수천 번 매질을 당하는 이 특수한 순환이 없다면, 철은 그저 쓸모없는 광석 덩어리로 남을 뿐이다.
우리에게 버팀은 이런 의도적인 담금질이어야 한다.
그저 불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불을 통해 이전의 자신으로서는 결코 해낼 수 없었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로 반드시 거듭나는 중이어야 한다. 스트레스를 통해 강해진다는 이 개념은 비유에 그치지 않고 '안티프래질(Antifragility)'이라는 생물학적 실체로 증명되어야 한다. 인간의 신체는 가치를 창출하는 버팀의 걸작이다. 인간의 뼈를 예로 들어보자. 정형외과와 운동 생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원리인 '울프의 법칙(Wolff's Law)'에 따르면, 골조직은 가해지는 압력과 충격에 반응하여 더 단단하고 조밀해진다. 달리기를 하거나 무게를 들 때, 기술적으로 골격계에 '스트레스'를 가하는 셈이다. 신체는 이 스트레스를 단순히 견뎌내어 현상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더 높은 가치인 '골밀도'를 생성하라는 신호로 활용한다. 만약 모든 스트레스를 회피한다면 우리의 뼈는 오히려 약해지고 부서지기 쉬운 상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을 '살아남는' 행위가 뼈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법이다"라는 영화 속 대사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라, 회복탄력성을 능동적으로 축적해 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망치'와 '목적'을 잊었을 때 '버텨라'라는 말의 폭력성은 다시 고개를 든다. 성장을 위한 도구나 변화를 위한 경로를 제공하지 않은 채 독성만 가득한 환경에서 견디라고만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폭력의 절정이다. 철을 화덕 속에 넣어두기만 하고 모루 위로 꺼내지 않는 것과 같다. 결국 철은 형체도 없이 녹아버릴 뿐이다. 이러한 '멜트다운'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버팀은 반드시 '가치 지향적'이어야 한다. 힘겨운 직장 생활이나 고통스러운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면,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이 소비의 아웃풋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고 있는가?"
"미래에 나의 지렛대가 될 기술을 연마하고 있는가?"
"위기 상황에서도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재련된' 인격을 형성하고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무것도 없다'라면, 우리는 단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버려지고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버티는 행위'를 재정의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침묵 섞인 복종이 아니라, 생산을 향한 격렬한 내면의 선언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버팀의 계절을 지나고 있다면, 스스로를 칼을 만드는 장인처럼 대해야 한다. 현재 당신이 처한 상황의 '열기'를 변화에 필요한 에너지로 인식하고, 비난이나 실패라는 '망치질'을 날카로운 날을 세우기 위한 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이 상황을 견뎌야만 한다"는 부담감을 "나는 이것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창조적 의지로 바꿔보는 것을 어떨까. 가치는 당신이 고통받은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시간에 부여한 '의도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버텨라'라는 말을 공허한 명령이 아닌 창조적인 전략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솔직해지자. 버팀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이 되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버팀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겠다는 의지가 결합될 때, 그것은 자아실현의 가장 숭고한 형태가 된다. 우리는 모두 삶의 여러 지점에서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 의해 달궈지고 두들겨진다. 중요한 것은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마침내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어떤 도구가 되어 있을 것인가가 하는 기대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재련하고 있는가?
삶이라는 물결에 마모되어 모래가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불길과 망치질을 받아들여 강철로 거듭나고 있는가. 당신이 갈구하는 강함은 시련 이전에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련을 통해 당신이 창출해 낸 가치 그 자체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