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영국 철학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는 관념론(idealism)을 주창하며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re est percipi)"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이는 사물의 존재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 즉 관찰자의 지각 여부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그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편, 양자역학에서는 관측 행위가 관측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론이다. 양자역학의 대표적인 해석 중 하나인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입자는 측정되기 전까지 확률적인 상태(예: 파동 함수)로 존재하며, 관측 행위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특정 상태로 '붕괴'하여 명확한 모습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전자는 측정 여부에 따라 '파동'과 '입자'라는 두 가지 성질을 오가며 나타난다. 이중 슬릿 실험(Double-Slit Experiment)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전자가 관찰되지 않을 때는 간섭무늬를 그리며 파동처럼 행동하지만, 관찰 장치를 설치해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 확인하면 입자처럼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출처: Lummi.aiⓒNika
이 두 학문, 즉 인식론(epistemology)과 양자역학은 얼핏 상반된 분야처럼 보이지만, '관찰'이라는 행위가 '지각'이나 '상태'를 결정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관찰 여부에 따라 사물의 존재나 형태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 두 이론은 맥락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좀 더 깊이 탐구하기 위해 몇 가지 관점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존재와 인식의 관점
조지 버클리는 사물의 존재가 오직 그것이 인식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관찰자, 즉 정신(mind)이 없다면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을 떠나 문을 닫으면 방 안의 물건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할 수 있다. 반면, 양자역학에서는 전자가 특정 위치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측정 순간에만 확정된다. 측정 전에는 전자가 여러 가능성(확률 분포) 속에 퍼져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전자가 '여기 있다'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측정할 때뿐이며, 그전에는 단지 확률적으로만 존재한다고 해석한다. 이처럼 버클리의 인식론과 양자역학 모두 존재가 관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시각을 보여준다.
둘째, 관찰자의 역할
버클리의 초기 철학에서는 사물이 관찰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나, 그가 천주교 신부가 된 이후 이 주장은 수정된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하지 않더라도 신(God)이 모든 것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기에 사물이 계속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관찰자의 역할을 신에게로 확대한 셈이다. 반면,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관찰 행위가 입자의 상태를 결정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ödinger's Cat) 사고 실험을 생각해 보자. 상자 안의 고양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중첩 상태)에 있다가, 상자를 열어 관찰하는 순간 그 상태가 확정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관찰이 없다면 실재 자체가 모호한 상태로 남을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이론 모두 관찰자가 실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셋째, 실재의 본질
버클리는 물리적 세계를 감각 경험의 총합으로 보았으며, 독립적인 물질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 나무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듣고, 만질 때만 존재하며, 그 외에는 정신 속에서만 유지된다. 반면,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갖는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는 관찰 여부에 따라 파동처럼 퍼지거나 입자처럼 특정 위치를 점유한다. 이는 실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버클리의 '실재는 지각에 의존한다'는 주장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식론과 양자역학은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물(인식론)이나 입자(양자역학)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 시절 즐기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과 비슷한 이치를 떠올리게 한다. (출처: 이슈PICK 쌤과함께, 양자역학 김상욱 교수 편)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진행자가 뒤돌아보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앞을 볼 때 움직인다. 인간이 보는 순간 사물이 특정 형태로 고정되고, 보지 않을 때는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양자역학과도 유사하고 인식론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전자는 관찰되지 않을 때 파동처럼 퍼져 있지만, 관찰하는 순간 입자로서의 특정 상태를 갖기 때문이고, 보고 있지 않을 때는 그것이 어떻게 동작할진 모르지만 보는 순간 특정한 형태로 정지된 모습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학자가 이런 해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재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에 반대하며 "자연은 우리의 관측 여부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확률적 해석은 이론이 불완전하다는 증거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명한 질문, "내가 달을 보지 않을 때도 달은 거기에 있는가?"를 던지며 실재가 관찰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이는 버클리의 초기 관점과 대치되지만, 후기 버클리가 신의 관찰을 통해 사물의 존재를 설명한 것과는 일정 부분 공명한다고 본다.
결국 인간의 관찰 여부가 자연의 존재론적 실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 지점에선 두 학문은 다시 서로 갈라진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사유의 시작
이처럼 철학적 인식론과 과학적 양자역학은 '관찰'이라는 공통 주제를 통해 서로를 비추며 사고의 여지를 제공한다. 공학적 현상에서도 철학적 요소를 발견하고, 한 현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은 사유(思惟)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버클리와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