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한미 수필문학상 (2023년) 응모작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던 환절기의 어느 날, 외과계 중환자실에서 회진을 돌고 있는데, 소아 중환자실로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16세 여자 환자가 승용차에 탑승하고 있다가 대형 트럭과의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서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하는데, 소아 중환자실은 자리가 부족해서, 성인 외과계 중환자실에 대신 입원이 가능하겠냐고 묻는 전화였다. 보통 서양의 16세 환자들은 발육과 성장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키와 몸무게가 성인과 거의 비슷한 경우를 많이 보았던 터라, 나는 흔쾌히 외과 중환자실로 입원을 받아 주었다.
그러나 소아 응급실에서 이송된 환자는, 아직 급성장기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나의 예상과는 달리 몸무게가 30 Kg 중반을 간신히 넘길 정도로 가냘팠다.
외상외과 와 중환자실 레지던트들의 경과보고를 들으니, 고속도로에서 승용차와 대형트럭 사이에 교통사고가 매우 크게 났는데 승용차에는 환자의 부모와 환자 그리고 여동생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 고속도로에서 크게 교통사고가 나는 경우의 상당수는 18-Wheeler라고 불리는 화물 트럭과의 사고가 차지하는데, 환자가 탑승했던 승용차도 18-Wheeler와 사고가 난 경우였다.
워낙 커다란 화물트럭이라 그런지 18-Wheeler와 사고가 났던 차량에 탑승했던 환자들 대부분은 결말이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응급의료팀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환자의 호흡이 약했고 머리 부위의 손상이 심해 현장에서 즉시 호흡관을 넣고 우리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신경외과 협진을 받은 결과 환자의 영상학적 그리고 신경학적 소견상 매우 심한 뇌 손상이 확인되었고 이는 수술이나 술기로 바로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예후가 매우 좋지 않다는 진료소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환자의 부모와 동생은 같은 차량에 타고 있었지만 경미한 부상만 입어서 병원에서 곧 퇴원했다고 한다.
뇌손상이 심했지만 그래도 환자의 나이가 어렸던 만큼 회복이 되기를 바랐지만 몇 시간 후에는 환자가 자발적 호흡이 아예 사라졌고 신경학적 검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뇌사가 의심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지역 장기 기증 센터에 연락을 취하는 동시에 뇌사 판정을 위한 절차에 들어가야 했다.
16세의 환자는 연령상 소아에 해당했기 때문에, 소아 뇌사 판정 가이드라인에 따라 무호흡검사와 핵의학 뇌관류 검사를 12시간 간격으로 따로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시 환자의 병실을 방문했을 때에는 환자의 눈과 머리 주위가 온통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환자의 뇌내 압력이 너무 높아져서 그런지, 환자의 안구가 돌출되고, 뇌척수액이 코에서 흘러내려서, 신경외과의의 조언대로 붕대로 가려 놓았다고 했다.
12시간 간격으로 따로 시행된 무호흡 검사와 핵의학 뇌관류 검사 결과 환자는 뇌사 여부가 최종 판정이 났고 환자의 사망시각은 핵의학 검사 판독이 완료된 시간이 법적 사망시각으로 확정되었다.
환자의 가족들이 병원에 있지 않아 어머니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환자의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차분하게 응답했고, 가족들과 함께 곧 환자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 사실을 장기 기증 코디네이터에게 알리고 나머지 회진을 마쳤다.
그날 저녁 오후 회진을 마치고 있을 때쯤,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 하나가 나에게 중환자실 병실 안에 꽃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감염병 예방이 중요한 중환자실 규정상, 외부로부터 식물은 반입할 수 없다고 잘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실망한 듯한 표정의 소녀가 다시 되돌아가는 방향의 병실을 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그 소녀는 뇌사가 확정된 환자와 같은 차량에 동승하였으나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아서 금방 퇴원했다던 환자의 동생인 듯싶었다. 부랴부랴 담당 간호사에게 꽃의 반입을 허용해 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예외적으로 반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환자의 부모들은 장기기증 코디네이터의 설명을 듣느라, 회의실에 들어가 있었고, 목사인 듯한 사람과 환자의 동생만이 병실 안에서 환자 옆을 지키고 있었다.
환자의 부모들은 뇌사상태인 딸의 장기기증을 결심하고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나서 중환자실 팀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환자와 가족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가로막힌 커튼 사이로 낮은 목소리로 간단한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
환자 가족들이 돌아간 다음 다시 방문한 환자의 머리맡에는 환자의 동생이 놓고 간듯한 해바라기 한송이가 수수한 비닐 포장지에 싸여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환자의 장기는 장기 이식 대기 순서에 따라 배정되었고, 장기 기증 수술은 그다음 날로 확정되었다.
환자는 비록 이미 법적으로는 죽음이 선언되었지만 그 숭고한 기증의사에 부합하게 장기 기증 수술이 무사히 마무리되도록 하는 것이 내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기 위해 병실을 방문했을 때에는 해바라기 한송이가 하루 사이에 많이 시든 모습으로 그대로 환자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중환자실과 마찬가지로 수술실안에서도 감염의 위험이 있으므로 외부의 식물을 들고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가족들이 환자에게 놓고 간 마지막 마음인듯한 해바라기 한송이를 내 임의로 치워버릴 수는 없어서 그대로 수술실까지 환자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수술실에 도착해서 최종적으로 환자를 수술대로 옮길 때에는 해바라기 한송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다시 한번 고민이 되었다. 가족들의 마음이 마지막까지 환자 바로 곁에 함께 있어줄 수 있다는 막연한 감상보다는, 이 소녀 환자의 장기들이 다른 환자들에게 무사히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기 기증을 결심한 이 환자 가족들의 실질적이고 궁극적인 소망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해바라기는 환자가 실려왔던 침상 위에 놓여 수술실 밖으로 내 보내졌다.
장기 기증 코디네이터가 심장은 피츠버그, 폐는 미네소타, 간과 신장은 우리 병원에 남아 이식이 필요한 환자에게 이식되기로 결정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수술실 안에는 미국 내 여러 병원의 해당 장기의 외과 전문의들이 직접 장기를 무사히 적출하기 위해서 모여 있었다.
보통 일반적인 수술 시에는 Time-out이라고 해서 환자의 수술부위와 위치를 최종적으로 수술방 내에 있는 모든 의료진들이 다 같이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뇌사자의 장기 기증 수술의 경우에는 보통 장기기증 코디네이터의 주도하에 환자와 가족들에게 장기 기증을 감사하는 의미에서 환자를 기리는 잠시간의 묵념을 하게 된다.
그렇게 짧은 묵념이 끝나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비록 환자는 법적으로는 사망이 확정된 뇌사상태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아직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뿐더러, 장기를 무사히 적출해서 안전하게 이식을 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사람만큼의 세심한 혈역학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환자의 심장은 피츠버그의 병원에 있는 환자에게 기증되기로 했으므로, 피츠버그에서 온 심장외과 전문의의 주도하에 수술이 이루어졌다. 환자의 폐를 기증받으러 온 흉부외과의는 최종적으로 기관지 내시경으로 환자의 폐를 다시 한번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를 원했다. 심장 적출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 흉부외과의의 주도하에 기관지 내시경도 함께 진행되었다. 한참 기관지 내시경을 진행하던 흉부외과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아쉬운듯한 탄식을 내뱉었다.
보통 폐를 이식장기로 고려할 때에는 폐 안에 타박상의 흔적이 있는지를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하는데... 기관지 내시경상 환자의 폐에 타박상의 소견이 보인다고 했다.
아마도 교통사고가 났을 때에, 환자의 머리손상과 더불어, 폐에도 충격이 가해진 거 같다고 했다.
그 흉부외과의는 자기 환자에게 최상의 결과를 주기 위해서는, 이렇게 타박상의 흔적이 있는 폐는 이식장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흉부외과의와 대화를 하면서,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패용하고 계신 신분증을 보니, 내가 몇 년 전에 외과 인턴으로 일했던 병원에서 오신 흉부외과 교수님이셨다. 어쩐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일했던 짧은 1년의 기간 내에 오다가다 본 적이 있나 보다.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왔어도, 장기가 부적합하여 이식받게 될 환자에게 해가 될 수 있으면, 과감히 포기하는 결단성에 감탄하면서도...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허탕치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자기 환자에게 이식할 폐를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한 걸음에 멀리서 달려오셨을 텐데...
보통 장기 기증 수술에서 심장이 포함되는 경우, 심장이 가장 우선순위를 가지게 되며 다른 장기들은 심장이 안정적으로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통상의 장기 기증 수술보다 좀 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어느덧 모든 장기들이 준비되었고, 대동맥 결찰과 동시에 많은 양의 얼음이 환자의 흉강과 복강으로 쏟아졌다. 이로써 환자의 생물학적 죽음이 확정되었다.
환자의 폐에 산소를 불어넣던 인공호흡기의 마지막 호흡을 끝으로 내 손으로 직접 끄고, 수술실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번 그 환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16살의 나이에 몸무게가 30Kg 중반 밖에 안되던 가냘펐던 소녀 환자… 그러나 장기기증으로 다른 여러 환자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고 떠난 환자를 보고 있으니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애석함과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수술실밖에 세워져 있던 그 환자의 침상 위에는 아직도 시들어 있던 그 해바라기 한송이가 놓여있었다.
그 해바라기가 미처 피워 보지 못한 16살 소녀 환자의 상황을 너무 잘 대변하는 거 같아 서글퍼 보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래도 이 해바라기 한송이는 꽃을 피운 후에 시들었으니 이 16살 소녀 환자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기증받은 장기들이 부디 성공적으로 이식되어 소녀환자와 그 가족의 숭고한 뜻이 다른 여러 환자들에게 위대한 생명과 희망의 선물이 되기를 나는 다시 한번 간절히 소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