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장석남
나는 오래된 정원을 하나 가지고 있지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더 이상은 아물지도 않았지
시간을 발밑에 묻고 있는 꽃나무와
이마 환하고 그림자 긴 바윗돌의 인사를 보며
나는 그곳으로 들어서곤 했지
무성한 빗방울 지나갈 땐 커다란 손바닥이
정원의 어느 곳에서부턴가 자라나와
정원 위에 펼치던 것
나는 내 가슴에 숨어서 보곤 했지
왜 그랬을까
새들이 날아가면 공중에 길이 났어
새보다 내겐 공중의 길이 더 선명했어
어디에 닿을 지
별은 받침대도 없이 뜨곤 했지
내가 저 별을 보기까지
수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나는 떡갈나무의 번역으로도 읽고
강아지풀의 번역으로도 읽었지
물방울이 맺힌 걸 보면
물방울 속에서 많은 얼굴들이 보였어
빗물들은 물방울을 안고 흩어지곤 했지
그러면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삶이 상처라고
길을 나서는 모든 아픔과 아픔의 추억과
저 녹슨 풍향계만이 알 뿐이지
장석남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지금은 간신히 그립지 않을 무렵>에 수록된 시이다.
외울 정도로 이 시를 좋아했다.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은 섬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의 삶의 자취들이 담겼고, 두 번째 시집은 보다 정제되고 가다듬어진 작가의 내면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시에는 '그리움'이 담겼다.
누구나 가슴에 자신만의 정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에 들어서서 그곳에서 그 상처를 온전히 받아주고 담담히 안아주는 자연물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나에게도 <오래된 정원>이 있다.
아픔도 있고, 상처도 있지만 또 그곳엔 찬란함도 있고 그리움도 있다.
살아내야 하는 현실에 잊고 살다가도 가끔씩 그 정원으로 들어가 지난 시간을 반추하면서 혼자만의 감상에 젖곤 한다.
지나온 시간은 상처이기도 했지만 아름다웠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나>를 정원에서 만나 조용히 안아주고 다독여 주고 돌아오곤 한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이제는 완벽하게 이해한다.
철없고 무모하고 하나에 모든 걸 다 걸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때의 나>를 사랑한다.
이제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한없이 그립다.
다들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겠지.
비 오는 아침에 이런 감상에 젖어 있다.
장석남 시인의 시집 <왼쪽 가슴에 온 통증>에 수록된 시로 마무리를 한다.
이 시는 문학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시다.
떠나는 사랑에 대한 미련과 감정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배를 밀며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 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