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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06. 2021

<연년세세>,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2021년 2월 이프 토론 모임 정리


* 토론 책: <연년세세> (황정은, 창비, 2020)

* 일시: 3월 2일(화) 저녁 7시 반 - 10시

* 참석: 슬, 민, 혜, 덕, 숙.

* 방법: 화상 회의 앱 '줌' 토론. 숙 진행.






사랑하는 이프 벗들아!


이번 책 <연년세세> 여운이 참 길지?

2월 모임이 미뤄져서 3월 초에야 했네? 그래서 더 고마웠어.

 


역시 문학이야. 역시 소설을 읽어야 해 그치? 황정은 작가는 처음인데, 지난번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때처럼 난 배가 살살 아프려 해. 아~~ 작가들 왜 이리 잘 쓰는 거야! 음미할수록 더 그래. 마침 슬이 이달 이프 스케치를 잘 해서 올려줬길래 나도 동기부여됐어. 멋짐 뿜뿜한 글 고마워 슬! 줌 토론 이후 후기를 내가 많이 못 쓰고 살았는데, 덕분에 편지 같은 수다체로 정리해 보고 싶어졌어.



소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 같은 이 느낌 너무 좋아. 내가 인생을 얼마나 모르는지 또 알게 해 줬어. 아니, 솔직히 말할게.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게 해 주는 소설이었어. <파묘>, <무명>, <하고 싶은 말>,그리고 <다가오는 것들>. 이 네 편이 다 걸작이었어. 그게 또 연작으로 큰 이야기가 되는 걸 이프 벗들 덕에 깊이 감상할 수 있었어. 토론하는 벗들아, 너무너무 고마워.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그러게나 말이야. 작가가 후기에서 썼듯 '순자'라는 이름에서 출발한 작품이래. 작가의 어머니 이름도 순자랬지? 순할 순 아들 자. 여자들 이름은 왜 모조리 그따위로 지었을까?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은 왜 죄다 여자 이름일까? 착하고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게 전부야? 아들 낳기 위한 디딤돌. 아들 키우기 위한 불쏘시개. 그렇게 하찮게 취급받은 여성들에게 작가는 마이크를 주고 말하게 했지. 작가에게 감사해.



내친김에 인터넷을 뒤져 봤어. 시대별로 가장 흔한 여자 이름 순위 쉽게 찾을 수 있었어. 40년대 가장 흔한 이름이 '순자'였다면 그다음엔 '0숙'이었지. 우째 그렇게도 뻔한 이름을 돌려 막기 했을꼬. 순자 씨가 태어난 40년대와 내가 태어난 60년대,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이 흘렀건만, 그게 대수겠어? 이 땅에 나고 자란 여성이 경험하는 삶이란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다 이거야. 아 참, 내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나 내가 이야기했던가?



내가 태어나고 며칠 안 됐을 때 면에서 호구조사인가 뭐 그런 걸 나왔더래.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 날이었는데 난 아직 이름이 없는 아기였어. 어머니가 얼라 이름 아직 안 지었다고 말하니까 면서기가 재촉하며 맘대로 적더래.

"첫째 딸 이름이 화0, 아들 이름은 진0, 그럼 둘째 딸이니까 얼라 이름은 화숙이라 카면 되겠네요."

그렇게 면서기 맘대로 적어가서 내 이름을 올려놨더라나 뭐라나.....



아줌마 친구들 중에 자기 이름 맘에 안 들어 하는 경우 드물지 않아. 개명하는 경우도 많지. 나도 내 이름 썩 맘에 안 들었어. 흔하디흔한 숙이니까 별생각 없다가도 내 이름이 지어진 이야기를 떠올리면 기분이 별로였어. 만약 아들이었어도 그렇게 처리하게 뒀을까? 감히 남의 자식 이름을 면서기가 맘대로 그럴 수 있었겠어? 우리 부모는 그걸 재미있는 노래라도 되는 양 자주 불렀다는 소리야. 그러나 그건 1절에 불과했어.


"니가 아들이었으모 울메나 좋겠노."

"니는 딱 뱃속에서 노는 짓도 아들이었고, 배부른 태도 아들 배였다."

"너그 오라비 밑에 바로 이어서 둘째 아들이라 믿었더니 딸이 떡 나오더라. 너그 할매 실망해서 주저앉더라."

지금 생각하면 참 들어줄 수 없는 소리였어. 원초적으로 잘못된 존재라는 느낌인데 내가 자존감이 있겠어?



그뿐 아냐. <무명>에서 내게 뼈 때리는 문장이 있어 놀랐다 그랬지?


"다섯 살 등에 업힌 세 살의 무게. 나는 그 밤 그 밭골에서 천근만근의 무게를 알았다."(103쪽)


나도 정확히 세 살 아래 남동생을 업어야 했거든. 남동생은 5남매 중 막내에다 그렇게 노래 부른 둘째 아들이었어. 나랑 연년생 여동생이 있고 그 두 살 아래가 남동생이었어. 남동생은 다섯 살이 돼서야 젖을 뗐어. 뛰어놀다가 와서 엄마젖 찾는 응석받이였지. 나는 세 살 아래 그 남동생을 늘 업어주는 누나였어. 친구들하고 놀러 나가도 동생은 늘 내 등에 있었다고 봐야지. 엄마가 밭에 일하면 동생 업고 젖 먹이러 가는 게 내 일이었고.



내 나이 많아봤자 다섯 살 아님 여섯 살 때였을 거야. 어린 남동생을 띠로 단단히 싸매서 업고 간 기억이 나거든. 여름이라 샘물 한 주전자까지 들고 밭으로 젖 먹이러 가는 길이었어. 논둑길과 또랑 사이를 걷다가 내가 또랑에 콕 처박혀 버렸어. 무게가 거꾸로 쏠렸으니 내가 일어날 수가 없는 거야. 등에 업은 아이의 무게는 천근만근. 남동생도 울고 여동생도 울고. 나는 아무리 낑낑대도 못 일어나고. 다른 밭에 있던 동네 사람이 달려와 꺼내 줘야 했어.



작가는 사람들이 <연년세세>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지 궁금하대.


가족 이야기란 게 뭘까? 부부는 오순도순 화목하고 아이들은 토끼처럼 사랑스러운 이야기? 할아버지 할머니에 고모 삼촌까지 대가족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 이야기?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가족 이야기일까? 순자 씨에게 가족이란 뭐였을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족은 뭐지? 가족 이야기, 곧 정치 이야기 아냐?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니까! 이 사회의 축소판이자 단면이요 가장 적나라한 정치판이 가족이니까.



순자 씨가 겪은 성차별 좀 봐. 변변한 가족도 없었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순자 씨는 학대받고 차별당했어. 모진 역사 속에 살아남고도, 아들이 아니라서 "하나 남은 저거" 취급받았지. 피붙이란 이름으로 고모는 순자 씨를 함부로 부려먹고 막대하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했지. 남편에게 순자 씨는 가족도 아니었어. 순자 씨 외할아버지를 남편은 결코 가족이라 여기지 않았거든. 딸네를 포함한 대 가족은 어땠어? 순자 씨는 가사도우미일 뿐이었지.





<연년세세>를 두 번 읽어도 내겐 해소되지 못한 부분이 많아.


<다가오는 것들>이 특히 그래.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다시 볼 생각이야. 안산이 등장하는 것도 놀랐잖아. 생명안전공원 이야기도 더 살펴봐야 할 거 같아. 무거운 이야기이면서 희망을 보게 됐달까? 연년세세, 순자 씨나 그 딸들이나, 여성의 삶은 별 달라진 게 없다는 걸 보여주지 않디? 그래도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아내는 여성들, 그게 희망이잖아?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는 여성의 삶. 다시 사랑하며, 지금 여기의 삶을 우린 살아낼 거니까 말이야.



그래도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아내는 여성들, 그게 희망이잖아?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는 여성의 삶. 다시 사랑하며, 지금 여기의 삶을 우린 살아낼 거니까 말이야.



어느새 이프가 함께 토론한 게 5년 차야. 믿어져?

함께 하는 벗들이 있어서 가능했어.


나는 복받은 사람이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여성노동자회니까 페미니즘 토론은 엄청 인기일 줄 알았어.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하게 됐어.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고사하고 한 달 책 한 권 읽고 토론하는 게 얼마나 '사치'인지 말이야. 연년세세, 현실 속 여성이란 집에서도 밖에서도 일이 끝나지 않잖아. 살림과 육아와 직장 사이를 종종거리며 오가야 하는 벗들이잖아. 이젠 이프 존재만으로 점점 고마운 맘이야.



같은 책 같은 영화를 보고 토론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 하나면 족해. 내가 못 본 지점을 네가 보고, 네가 놓친 건 내가 짚고. 아줌마 셋은 모여야 드라마 하나가 완성된다고 했던가? 함께 보면 더 잘 보이고 더 깊이 나누니까. 우리의 삶을 이곳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며 함께 토론할 수 있어서 고마워. 각자 조금씩 다른 마지막 키워드 카드 좀 봐. 이 맛이야. 슬이 정리해 준 이프 스케치가 있으니 나는 가볍게 마무리할게.


이프 벗들아 다시 한번 고마워~~~



여성의 이름.

하고 싶은 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곳에서.

안간힘.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3.8세계여성의 날'이 든 3월이다~~! 영화 <아이엠우먼> 토론 때 보자!










절할 때 보니 네 아버지가 저만큼 떨어져서 뒷짐을 진 채 굳이 돌아서 있더라, 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기서 뭘 하느냐고 이리 와서 절 올리라고 말했더니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고 잡소리를 하기에 너무 당혹스럽고 열받아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얼른 절 올리라고 역정을 냈는데 그걸 듣고도 뒷짐 지고 서 있더라며 그 뒤로 야속하고 징그러워 같이 오자고 하지 않았다고, 네 아버지와 동행한 것은 그것 딱 한 번으로 그쳤다고 이순일은 말했다. 27.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44.



나였어, 하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내가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불신한 건 그 외국인이나 그의 말이 아니고 나였어...... 네가 그 정도로 매력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게 김원상의 생각인 것 같았고 한영진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것 같았다. 53.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81.



오늘은 남편보다는 엄마와 대면할 일이 걱정이었다. 한영진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순일에게 묻고 싶은 오랜 질문이,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 한영진은 그러나 그걸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순일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83



너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어.

기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누군가의 목소리로 한영진은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전철 안에서, 누가 말했는지를 보려고 한영진은 고개를 돌렸다.

전철이 지하 구간을 벗어나 지상의 밤 속으로 나아간 뒤 철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거짓말

거짓말, 하고 생각할 때마다 어째서 피 맛을 느끼곤 하는지 모를 일이라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84.



다섯 살 등에 업힌 세 살의 무게. 나는 그 밤 그 밭골에서 천근만근의 무게를 알았다. 백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아이는 내 등에 업혀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서 달을 등진 채 한동안 서 있을 때에도, 다급히 짐을 꾸려 떠난 흔적으로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방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누워 있을 대에도 그 아이는 있었다. 103.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대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142.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고 그리고 거기서 죽을 것이다. 145.



계속 생각하다 보면 내가 결국은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어른이 되면 조금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146.



나는 생각해.

양갈보, 양색시.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안나를 고립시키고 무시하고 경멸한 그들과, 그들의 언어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생각해. 안나를 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과 말이야. 그는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 둔 거야. 177.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다가오니까, 하고 하미영은 말했다.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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