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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꽃의 정치학

남성은 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꽃을 줄까?

by 꿀벌 김화숙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폴레트 켈리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지만 그를 떠나기도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나는 남편한테서 꽃을 받으면 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떠올리곤 한다.


올해 3.8 세계 여성의 날 축하꽃을 받고도 어김없이 생각났다. 며칠 전 읽은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의 한 문장도 떠올랐다. "모든 살아남은 여성은 위대하다." 축하꽃을 받고 무슨 그런 우울한 생각을 하느냐고? 어딘가엔 이런 날 폭력의 꽃을 받는 여성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니 어쩔 수 없다. 꽃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는가.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꽃이란 폭력의 다른 이름. 폭력과 지배의 사슬은 꽃의 얼굴을 할 수 있으니까.



폴레스 켈리는 가정폭력 생존자다. 남편에게 13년간 폭력을 당하며 살다 탈출해서 새 삶을 사는 미국 여성이다. 가정 폭력 피해 여성으로서 또 다른 피해 여성을 위해 쓴 글이 <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다. 폭력의 사슬을 끊는 길은 어쩌면 유일한지도 모른다. 폭력의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를 떠날 만큼 힘과 용기를 내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의 김은화 작가의 어머니 역시 폭력 남편과 이혼한 후에야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었다.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은 결코 개인적이지도 사소한 것도 아니다.


가부장적 문화와 구조적인 문제다. 마치 여성이 남성 폭력을 유발하는 원인인 양 하는 거짓말을 우리는 너무 많이 들었다. 마침 오늘 나는 한 통계자료를 읽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20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을 분석한 기사였다.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최소 97명이었다.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31명. 또한, 피해 여성의 자녀나 부모, 친구 등 주변인이 중상을 입거나 생명을 잃은 경우도 최소 57명에 달했다.




남성은 왜 여성을 죽일까?

남성은 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까?

남자는 왜 여자를 때리면서 꽃을 줄까?

여성에 대한 남성 폭력은 개인의 문제일까?

남성의 지배욕은 과연 사랑일까?



30년 이상 결혼 관계 안에 살며 내가 연구하는 주제이자 우리 부부의 관심사다. 우리는 어제도 꽃을 주고받았다. 그가 내게 꽃을 사는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여성의 날, 그리고 또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꽃이 오간다. 꽃만큼 축하와 기쁨을 더 잘 표현할 선물이 있을까? 비싼 보석도 장신구도 모르고, 명품 백도 모르고 살아온 나. 화려한 옷도 구두도 나는 모른다. 나의 유일한 사치가 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꽃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이름하여, 꽃의 정치학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제113회 3.8세계 여성의 날, 20대 내 딸도 아빠로부터 꽃을 받았다. 성인 딸이 여성의 날 축하꽃을 아빠로부터 처음 받았다. 늘 엄마 곁에서 더불어 축하받는 '어린' 존재였으니까. 독립된 성인 여성으로서 아빠에게 받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꽃이었다. 가부장적인 문화의 아버지와 딸 말고, 미래 세대 여성을 응원하는 아빠의 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페미니즘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우리는 친구요 동지로 아주 수평적인 새 관계를 맺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딸이 살아갈 미래를 축복하는 아빠 마음을 담은 꽃중의 꽃이었다.




벌써 오래전 10년도 더 전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성에 대한 부부의 관점 차이가 극명하게 보이는 장면이다.


나: 우리 딸이 나중에 커서 나처럼 살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남편: 당신처럼? 그럼 좋지 뭐. 당신은 최고의 아내고 최고의 엄마니까. 당신처럼만 살면 더 바랄 게 없지.

나: 그래? 진짜 그렇게 생각해?

남편: 그렇잖아. 요즘 애들이 당신처럼 살기 쉽지 않을 거거든. 엄마처럼 산다면 나는 좋다고 봐.

나: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내 딸이 기껏 나처럼 산다? 생각만 해도 나는 너무 비참한데?

남편: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생각해 봐. 똑똑하게 공부하면 뭐해? 결혼하면 기껏 남편 비위 맞추는 감정노동하며, 늘 남편 체면 남편 권력 밑에서 자기 개성도 주장도 죽이고 알아서 기어야 해.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을 최우선으로 올인하는 딸이 좋겠어?

남편: 무슨 소리야? 그렇게 안 하고 가정이 유지되겠어?

나: 내가 그렇게 안 살고 싶다면? 딸이 어른이 돼서 기껏 본 데 없이 나처럼 밖에 못 살까 난 미칠 거 같은데? 내가 과연 예수 정신을 따르는 삶일까? 아니면 가부장제의 종노릇일까? 내 딸이 이렇게 산다?.....



그런 대화를 하던 우리 부부에게 막을 수 없는 변화의 쓰나미가 덮쳐 왔다. 2016년 봄 어느 날 내가 독서토론에서 다녀와서 <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그에게 읽어 주었다. 당시 암 수술 2년 차, 나는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면서 독서와 토론으로 발이 넓어지던 때였다. 가정폭력 피해자 여성들의 이야기 속에 내 모습을 발견한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 심리 상태가 바로 그 시의 여성의 그것과 같다고. 뿐 아니라 가정폭력 남편들의 심리 상태는 바로 내 남편의 그것과 같더라고. 내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억울해 했다.



나는 시가 실린 정희진의 책 <아주 친밀한 폭력>을 그에게 내밀었다. 만약 그가 안 읽겠다면 나는 단호히 말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나는 당신과 그만 살고 싶은 거 같다고. 나는 당신을 떠날 마음인 거 같다고. 왜냐면, 폭력은 떠나지 않고는 끊을 방법이 없으니까. 나는 지혜롭게 화목한 가정을 관리하는 '현모양처'로 용을 써 왔던 것이다. 남편의 심기를 내가 알아서 돌봐야 평화가 유지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결코 평등한 부부가 아니라는 뼈때리는 깨달음이 덮쳐왔다. 1%에 드는 좋은 남편, 두들겨 패지 않는 폭력도 있었다. 




그래서 제113회 3.8 세계 여성의 날 꽃은 내게 다시 새롭다.


여성을 그저 꽃에 비유하며 예쁘게 가만히 있으라 하는 건 가부장 문화다. 여성을 폭력으로 지배하면서도 꽃으로 다시 입을 막고 얼르는 것도 가부장 문화다. 반면 꽃 따위 주지도 받지도 않고 이미 여성 상위 세상인 양 바라보는 것 역시 가부장적인 관점이다. 세계가 축하하건 말건 요지부동인 한국은 과연 가부장제에 익숙한 모습이겠다.  딸이 살아갈 미래는 더 성평등한 세상이길 응원하는 날이었다. 꽃 덕분에 우리 현실을 더 생각해 보는 날이었다.



아빠: 참 이상하지?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조용할까? 무슨 데이 무슨 날 하며 초콜릿 장사에 꽃 장사 잘도 하더니 왜 3.8 세계 여성의 날은 홍보하지 않지? 전 세계가 같이 기념하는 날인데 왜 우리나라는 아닐까?


딸: 무슨 데이 그런 장사는 한국 남자들의 심기를 안 건드리는 장사니까 되는 거야. 남자가 여자 꼬실 때 뭔가 주고 작업하고 그런 건 잘 먹히지. 그런데 세계 여성의 날 이러면 아는 거지. 여권신장이네 성 평등이네 성차별에 도전하네. 여자들이 고분고분 남자 하자는 대로 따라올 거 같지 않잖아. 여성 상위 시댄데 무슨 여성의 날이 필요하냐. 남성의 날은 없냐. 그딴 소리나 하지. 기울어진 거 바로잡자는데 여성 상위래. 말이 돼?ㅋㅋㅋ


아빠: 그래도 그렇지. 참 신기하단 말이지. 장사들은 편견 없이 돈 되는 거면 새로운 걸 시도하잖아. 3.8세계 여성의 날 축하 무슨 상품 이러면서 개발할 법도 한데 말이지. 미래를 내다보면 그쪽으로 가는 게 맞잖아?


딸: 당연하지. 이러니까 우리나라가 뒤처지는 거야. 다국적기업들이 페미니즘을 영업 전략으로 상업 광고에 차용하기는 하지. 그러나 기획자들이 전부 남자들인가 봐. 진짜 그 정신을 알고 따르는 경우는 드물지.


엄마: 날카로운 지적인걸? 우리 동네 꽃집 봤잖아. 러시아 쪽 남자들만 줄 서서 꽃 사. 다른 나라 하는 거 잘도 베껴 쓰는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여성의 날은 왜 안 따라 할까? 여성의 날을 여성계만 축하한다는 게 말이 돼? 모든 소수자들을 위한 날이란 게, 그만큼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해지는 건데. 유엔이 할 짓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닐 텐데 말이야. 한국이 가부장제가 공고하다는 소리지. 밖에서 보면 보이는데 우리나라 남자들은 여성 상위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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