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하지만 현실 아냐? 5년이 더 지난 이야기지만 어제 일 같이 생각나는 게 있어. 그때 일 년 이상 우리가 날마다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 말이야. 세상 누구보다 서로 잘 안다 믿었던 우리 두 사람. 그러나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그 미친 깨달음의 날들이 있었지. 천지가 다시 창조된 날이었고 내가 나로 다시 태어난 날. 너와 내가 죽고 우리가 알던 우리가 죽어 우주의 먼지로 흩어진 날 아닐까?
우리가 전혀 모르는 너와 나로 다시 마주 선 날이기도 했지.
“이제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일 홀가분해요. 남자한테 설명하다 지쳤어요!”
그 무렵 어느 날이었지. 내 지인 중에 5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여자가 내게 고백한 이 말 생각나? 내가 그 여자를 만나고 와선 감정 이입해가며 너한테 얘기해 줬잖아. 5년 함께 한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그 여자가 느낀 감정 봐. 슬픔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아니었어. 그건 해방감이었지. 더 이상 구질구질 설명해야 하는 사슬에서 풀려난 해방감. 알 거 같지 않아? 젊은 그 여자는 어떻게 그리도 일찍 깨달았을까?
“나를 안다고 하지 마!"
"나는 너를 모른다!”
아~~~ 내 마음에 번개가 또 내리치더군. 안개가 걷히고 햇빛 찬란한 새아침이 밝아왔어. 나는 기억해. 아~~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건 루머에 지나지 않았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나를 안다는 모든 것들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어. 아니 나는 너를 모르기로 결심해 버렸어. 네가 나를 모른다는 말도 필요없었어. 내가 너를 더 이상 모르기로 했지. 나는 너를 모른다! 내 가슴이 말했어. 세상이 어찌나 밝아 보이던지!
왜 그토록 너를 알려하고, 나를 알게 하려 했을까. 왜 안다고 믿었을까? 너도 나도. 그러나 어차피 설명으로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길은 하나. 이제 더 이상 나는 너를 알지 않기로 했지. 네가 알던 나도, 내가 알던 나도, 다 헛것이었어. 천년 전에 죽은 시체인 줄 우리만 몰랐던 거야. 우리가 알던 우리도 없었어. 이젠 나를 안다고 하는 자, 내 앞에서 비켜 줘. 그래, 나는 너를 모른다.
“누구세요?”
“모르겠는데요?”
늘 그랬듯 넌 알아듣지 못했지. 알아듣는 척했지. 네가 알아들을 수 있게 내가 더 설명하리라 믿었겠지. 사랑과 인내로 조곤조곤. 그런 헛짓거리를 또? 왜? 쓰레기에 핀 곰팡이였어. 그런 일 이제 없을 거야. 난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않기로 했지. 네가 알고자 하지 않는 나를 내가 어떻게 알게 해? 너의 이해와 공감을 얻고자, 너의 사랑과 호의를 잃지 않으려, 나를 갈아 넣던 그 헛짓,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넌 날 알 수도 없었고 알 의지도 없고 알 능력도 없었어.
그 무능과 무지를 너만 모르고 있었어. 그 어둠 속에 나는 천년 전에 죽은 시체였고 곰팡이였어. 아무것도 아니었어. 너는 너를 설명하지 않고도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너는 너를 내게 알게 하려 애쓴 적 있었니? 내가 네게 설명을 요구한 적 있었니? 그게 사랑일까? 나는 왜 나를 끝없이 설명해야 했을까? 너는 무슨 근거로 나를 안다고 생각했을까? 너는 누구를 안 걸까? 그건 찰나의 착각이었어.
가을이 오면 나무는 잎을 떨구고 몸을 가볍게 하지. 긴 겨울을 견디고 새 봄을 준비해야 하니까. 나는 암수술과 갱년기라는 가을을 통과하며 인생의 겨울을 보게 됐어. 가벼워져야 했어. 내 몸이 싫은 건 피하고, 짐은 벗어야 했지. 내 맘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과감히 벗어야 했어. 너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네게 무엇이었을까? 너를, 우리를, 행복도 사랑도 껍데기는 버려야 했지. 기껏 떨구고 버릴 잎이더군.
우린 여기까지. 너는 너의 길을 가! 나를 더 이상 안다고 말하지 마! 나는 내 길을 간다!
넌 사태를 알아차리더구나. 그동안 지겹게 설명하고 알게 해주려 했던 삶의 진실이 그 순간 보였을까.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 함부로 나와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냐. 넌 자유야!” 난 분명히 말했지. 난 더 이상 네 인정도 허락도 도움도, 네 사랑조차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네가 버림받을 수 있음을 비로소 알아차리더구나.
그래. 세상 다 버려도 내가 널 버릴 줄은 상상 못 했겠지. 나는 언제나 네 마음을 먼저 읽고 사랑하고 감쌀 줄 알았겠지. 너를 중심으로 도는 위성은 없어. 부디 안다고 하지 말아 줘. 나는 마음에서 너를 깨끗이 버렸고 너를 죽여버린 후였어. 네가 내 말을 이해하건 못 하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어. 너의 세계와 문법과 언어로 나를 규정하고 말하지 마.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았어. 오직 그것뿐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