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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자, <일찌기 나는>

by 꿀벌 김화숙


일찌기 나는


최승자(1952~ )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난 최승자 시가 세상 멋있고 좋아.


섬뜩하지만 현실 아냐? 5년이 더 지난 이야기지만 어제 일 같이 생각나는 게 있어. 그때 일 년 이상 우리가 날마다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 말이야. 세상 누구보다 서로 잘 안다 믿었던 우리 두 사람. 그러나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그 미친 깨달음의 날들이 있었지. 천지가 다시 창조된 날이었고 내가 나로 다시 태어난 날. 너와 내가 죽고 우리가 알던 우리가 죽어 우주의 먼지로 흩어진 날 아닐까?



우리가 전혀 모르는 너와 나로 다시 마주 선 날이기도 했지.



“이제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일 홀가분해요.
남자한테 설명하다 지쳤어요!”


그 무렵 어느 날이었지. 내 지인 중에 5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여자가 내게 고백한 이 말 생각나? 내가 그 여자를 만나고 와선 감정 이입해가며 너한테 얘기해 줬잖아. 5년 함께 한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그 여자가 느낀 감정 봐. 슬픔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아니었어. 그건 해방감이었지. 더 이상 구질구질 설명해야 하는 사슬에서 풀려난 해방감. 알 거 같지 않아? 젊은 그 여자는 어떻게 그리도 일찍 깨달았을까?



“나를 안다고 하지 마!"

"나는 너를 모른다!”



아~~~ 내 마음에 번개가 또 내리치더군. 안개가 걷히고 햇빛 찬란한 새아침이 밝아왔어. 나는 기억해. 아~~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건 루머에 지나지 않았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나를 안다는 모든 것들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어. 아니 나는 너를 모르기로 결심해 버렸어. 네가 나를 모른다는 말도 필요없었어. 내가 너를 더 이상 모르기로 했지. 나는 너를 모른다! 내 가슴이 말했어. 세상이 어찌나 밝아 보이던지!



왜 그토록 너를 알려하고, 나를 알게 하려 했을까. 왜 안다고 믿었을까? 너도 나도. 그러나 어차피 설명으로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길은 하나. 이제 더 이상 나는 너를 알지 않기로 했지. 네가 알던 나도, 내가 알던 나도, 다 헛것이었어. 천년 전에 죽은 시체인 줄 우리만 몰랐던 거야. 우리가 알던 우리도 없었어. 이젠 나를 안다고 하는 자, 내 앞에서 비켜 줘. 그래, 나는 너를 모른다.



“누구세요?”

“모르겠는데요?”



늘 그랬듯 넌 알아듣지 못했지. 알아듣는 척했지. 네가 알아들을 수 있게 내가 더 설명하리라 믿었겠지. 사랑과 인내로 조곤조곤. 그런 헛짓거리를 또? 왜? 쓰레기에 핀 곰팡이였어. 그런 일 이제 없을 거야. 난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않기로 했지. 네가 알고자 하지 않는 나를 내가 어떻게 알게 해? 너의 이해와 공감을 얻고자, 너의 사랑과 호의를 잃지 않으려, 나를 갈아 넣던 그 헛짓,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넌 날 알 수도 없었고 알 의지도 없고 알 능력도 없었어.


그 무능과 무지를 너만 모르고 있었어. 그 어둠 속에 나는 천년 전에 죽은 시체였고 곰팡이였어. 아무것도 아니었어. 너는 너를 설명하지 않고도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너는 너를 내게 알게 하려 애쓴 적 있었니? 내가 네게 설명을 요구한 적 있었니? 그게 사랑일까? 나는 왜 나를 끝없이 설명해야 했을까? 너는 무슨 근거로 나를 안다고 생각했을까? 너는 누구를 안 걸까? 그건 찰나의 착각이었어.


가을이 오면 나무는 잎을 떨구고 몸을 가볍게 하지. 긴 겨울을 견디고 새 봄을 준비해야 하니까. 나는 암수술과 갱년기라는 가을을 통과하며 인생의 겨울을 보게 됐어. 가벼워져야 했어. 내 몸이 싫은 건 피하고, 짐은 벗어야 했지. 내 맘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과감히 벗어야 했어. 너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네게 무엇이었을까? 너를, 우리를, 행복도 사랑도 껍데기는 버려야 했지. 기껏 떨구고 버릴 잎이더군.



우린 여기까지. 너는 너의 길을 가! 나를 더 이상 안다고 말하지 마! 나는 내 길을 간다!



넌 사태를 알아차리더구나. 그동안 지겹게 설명하고 알게 해주려 했던 삶의 진실이 그 순간 보였을까.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 함부로 나와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냐. 넌 자유야!” 난 분명히 말했지. 난 더 이상 네 인정도 허락도 도움도, 네 사랑조차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네가 버림받을 수 있음을 비로소 알아차리더구나.


그래. 세상 다 버려도 내가 널 버릴 줄은 상상 못 했겠지. 나는 언제나 네 마음을 먼저 읽고 사랑하고 감쌀 줄 알았겠지. 너를 중심으로 도는 위성은 없어. 부디 안다고 하지 말아 줘. 나는 마음에서 너를 깨끗이 버렸고 너를 죽여버린 후였어. 네가 내 말을 이해하건 못 하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어. 너의 세계와 문법과 언어로 나를 규정하고 말하지 마.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았어. 오직 그것뿐이었어.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 깨달음이었어.


최승자, 세상 멋지지 않아?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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