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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Jun 21. 2021

엄만 이제 포스터에서 손 떼!

디지털의 세계여! 나도 도움 안 받고 혼자서도 척척 잘하고 싶다.


"엄마~~ 포스터가 이게 뭐야~~"

"왜? 바쁜 딸 도움 안 받고 이달엔 엄마 혼자 끝내버렸어. 난 흡족해."

"아, 이건 아냐~~ 아무리 봐도 아냐. 내가 못 봐 주겠어~~"

"그냥 봐줘 버려. 엄만 눈을 낮췄어. 바쁜 딸 맨날 귀찮게 안 하려고."

"아냐, 글씨체며 이건 완전 테러야...."




토론 모임 '백합과 장미' 6월 포스터를 내 손에서 끝내 버렸다. 평소엔 딸의 도움으로 마무리했는데 이달엔 '이상한' 용기였다. 아니, 혼자 시도한 작품을 딸에게 보여줬더랬다. 너무 촌스러웠다. 이번엔 전에 딸 도움으로 만든 틀 중에 글과 사진을 바꿔 주물럭거려봤다. 이번엔 딸 안 보여주고 단톡방 공지로 올렸다. 딸이 냉큼 전화가 왔다. 너무 아니라 포스터 그냥 못 봐 주겠단다.



백합과 장미는 서울 교회에서 하는 토론 모임 이름이다. 우리끼리는 '전국구 온라인 토론'이라 우스개 한다. 왜냐면 서울과 경기에다 경상도 충청도에서 함께 하는 벗도 있기 때문이다. 뭘 토론하길래 그렇게 전국구씩이나? 말하자면,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책과 영화를 번갈아 토론하는, 남녀노소 평어 쓰는, 교회와 페미니즘의 만남이라 하겠다.



교회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성속의 이원론을 해체하는 '불온한' 모임. 어쩌다 나는 3년째 이 모임의 진행을 맡고 있다. 이달은 영화 <세 자매>를 토론한다. 매달 공지로 일정을 공유하지만 나는 웹자보를 만들어 뿌리고 싶어 한다. 누구든 관심 있는 사람 함께 하자 초대하기 편하니까. 이달 영화 <세 자매>의 재미를 어찌 나만 즐기랴. 그래서 발로 만든 포스터나마 마무리해버렸다.



문제는 너무 내게 어려운 컴퓨터작업이다. 포스터 하나 만들려면 품이 너무 들고 시간이 걸린다. 바쁜 우리 딸 이런 엄마 때문에 늘 더 바쁘다. 시간 없어 구시렁대면서도 결국 도와주고 깔끔하게 마무리해 주곤 했다. 자기 손이 안 간 작품이니 딸의 눈에 찰 리가 없다. 나는 내 실력 인정하고 타협해버렸다. 딸 도움 안 받고 해 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내 자립 의지를 칭찬할 줄 알았건만.



"아이고, 니가 알아서 전담해 주면 몰라도, 또 애쓰지 마. 엄만 해도 성과가 안 나오잖아. 볼만 한데 뭘. 발로 만든 거라도 엄마 혼자 했다는 데 의미를 두자. 그냥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딸만 바쁜 게 아니다. 나도 시간 없긴 마찬가지다. 진심으로, 포스터 만드는 일에 시간 많이 쓰고 싶지 않았다. 엄마 스스로 한 걸 칭찬하고 자기 귀찮게 안 한 걸 좋아라 할 줄 알았는데, 딸은 그게 아니다. 나는 한사코 그냥 두라고 하고 딸은 이런 포스터를 그냥 쓸 생각하냐 하고. 그럴 수도 있지 뭘.



"엄마! 이건 정말 아냐. 내가 못 봐주겠어. 아냐, 이건 화가 나!"


딸의 성격이 나오는 말에 나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래, 이해한다. 잘 하는 사람 눈으로 못난 걸 보고 있으면 화가 나는 심정. 나도 안다. 그렇다고 포스터 못 만들었다고 그 토론 모임이 형편없는 건 아냐. 이달엔 이런 식으로도 한 번 가 보는 거야. 여유 부리는 내게 딸이 쐐기를 박았다.



"안 되겠어. 엄만 이제 포스터에서 손 떼!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알았지?"




저 단호한 목소리를 보라.


딸은 스스로 못 봐줄 포스터 때문에 결론 내리고 말았다. 엄마는 손 떼! 이런 엄청난 결론이라니. 나는 회심을 미소를 지었다. 전화기로는 내 표정은 안 보여서 다행이다. 표정 관리하기 어려웠다!



 '잘하는 딸이 책임지고 매달 만들어주면 얼마나 좋아.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런 말은 차마 대놓고 하지 못했다. 딸의 성격을 아는지라, 그리고 딸의 마음을 아니까. 그래봤자 늘 딸은 마무리 투수였다. 이제 나더러 손 떼란다. 그럴 수 있길 얼마나 바라던 바인가!




 

딸의 감수를 거치지 않은 내 포스터(왼쪽)와 딸의 작품. 물론 오른쪽 것도 내가 첨에 시도한 버전이지만, 저런 맛이 안 나왔지.






아침에 일어나 확인해 보니 딸의 작품이 단톡방에 올라와 있었다. 두 개의 포스터가 연이어 올라와 있는 모양. 이 스토리를 누가 다 알까? 나는 멋진 이모티콘을 마구 날렸다. 그리곤 한마디 달았다.



"포스터가 왜 두 개? 아는 사람?"



수수께끼에 답하는사람이 나 지켜볼 일이다. 이런 속사정을 누가 다 알까? 아냐,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다 그러고 사는 거 아냐? 어떤 분야에선 세상 잘난척하는 나다. 큰아들이 하는 소리다. 그런데 왜 디지털에선 그렇게 멍청해지냐고. 인정한다. 넘사벽인 걸 난들 어쩌냐고. 모녀의 환상 콜라보, 최강 모녀 친구라지만, 들여다보면 이렇게도 딸에게 빈대붙어 살고 있는 거다.



껌딱지 엄마. 딸 없으면 우리 엄마 어찌 살까. 스스로 해 봐 엄마도. 엄마도 할 수 있어.....




가끔씩 딸한테 나는 껌딱지란 말을 듣는다. 자기한테 붙어 안 떨어진단다. 징글징글하게 딸을 찾는 엄마 때문에 비명이다. 아주 어렸을 때 딸도 엄마 껌딱지인 적 있었더랬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지, 자기 인생 잘 사는 성인이 된 거다. 나 스스로 시도했건만, 결국 딸이 마무리하는 상황이 됐다.



디지털의 세계여! 나도 도움 안 받고 혼자서 척척 잘하고 싶다. 나이 먹을수록 더 독립적이고 자립적이고 싶다. 누군가의 시혜와 돌봄의 대상이 되는 건 결코 즐거운 일 아니다. 그러나 그건 이상일뿐, 현실의 나는 바닥을 치고 산다. 나는 딸을 찾아 귀찮게 하는 엄마, 의존적인 사람 맞다.



"좋아. 엄마 혼자서도 잘 해 볼래!"

마음은 굴뚝같지만, 결국 버벅대다 나는 딸을 찾게 된다. 입이 한양 아니겠나.

"엄마, 적어 줄 테니 다음에 이렇게 해. 이 정도는 겁낼 거 없어. 혼자서 해결할 수 있어."

간단히 되는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금방 단호한 선생이었다가 딸은 다시 껌딱지의 딸이 된다.



내가 컴퓨터 못 하는 세대인 걸 딸도 인정한다. 도무지 학습이 안 되는 걸 안타까워한다. 도움을 청하면 바쁜 중에도 결국 도와준다. 수시로 구시렁대고 잔소리하면서. 아무리 가르쳐줘도 또 까먹어버리는 엄마가 얼마나 답답하겠나. 극한 운명이란다. 그러나 모든 걸 해결해 줄 맘은 없는 딸이다. 당연하지. 엄마가 딸만 의지하는 건 안 된다는 딸이다. 당연하지. 두말하면 잔소리지. 내가 혼자 하는 이유다.



딸을 생각하니 참 안쓰럽다. 엄마더러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몰아붙이고 잔소리할 때 보면 정말 무섭다. 내가 딸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스스로 해보려 무지 용을 쓴 거 딸은 알까?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들들은 멀리 있기도 하지만, 도움받으려면 더 조심하게 된다. 너무 멍청하고 한심한 엄마라고 애들이 한숨 쉴까봐, 그게 싫은 거다. 디지털 문명이 중노년 기를 팍팍 죽이는 현실이다.



자식들 귀찮게 할 일 생길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가까이 편히 물어볼 젊은 사람 없는 중노년의 고충에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얼마나 힘들까. 내가 직장에서 젊은 동료한테 자꾸 묻지 못해 집에 와서 애들한테 배우고 해결했던 시절도 생각난다. 잔소리를 들어도 자식이 그래도 만만한데.....



나 혼자 컴작업을 척척 잘하는 날? 내 생애 결코 없을 걸 나는 안다. 최소한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딸도 인정하는 바다. 나는 스스로를 볶지 않고 인정해 버렸다. 시간만 허비할 바엔 눈높이 낮추고 촌스러운 대로 사는 것도 길이다. 있는 틀에 적당히 변화를 시도했건만, 결국 이달 포스터도 딸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야 했다.



아~~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글을 쓰는 동안도 자꾸 입이 귀에 걸리려 한다. 딸이 내가 만든 포스터를 그냥 못 봐주겠다며 타박하던 어젯밤에도 그랬다. 그냥 눈높이를 낮춰 그대로 가자고 체념적으로 우겼지만 내 기분은 하늘을 날듯 좋았다. 나더러 포스터에서 이젠 손 떼라고 딸이 엄포를 놓은, 그때 내 기분이 가장 째지게 좋았다. 이건 뭘까? 어떻게 설명하지?



진작에 그럴 것이지.

딸아, 그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어. 엄마의 이 음흉한 미소를 용서하려무나.

엄만 진짜로 이제 포스터에서 손 뗄 거다. 콜?'

신난다~~

고마워 모야추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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