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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Jun 26. 2021

<큰엄마의 미친 봉고>, 페미니즘 로드무비의 발견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큰 엄마의 운전면허는 1종일까 2종일까?”



<큰엄마의 미친 봉고>(백승환 감독, 2021) 영화 토론 모임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어라?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었다. 그럼 영화 속 검은 봉고는 9인승일까 12인승일까?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갑론을박 끝에 12인승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큰엄마도, 나중에 운전을 교대한 아름과 은서도 모두 1종 면허 소지자여야 했다.



토론에 참여한 1종 운전면허 소지자 20대 여성의 목소리를 더 들어보자.



“난 운전할수록 내가 1종 따기 잘했다는 생각을 해. 면허 시험 보던 날이 생각나. 1종 줄에 남자들 여섯 명에 나만 여자였어. 나보고 여긴 1종 줄이라며 2종 줄로 가란 듯이 말한 남자도 있었어. 여자들은 2종일 거란 편견이지. 난 가끔 재난 상황을 상상해. 급히 탈출해야 하는데 1종으로 몰 수 있는 차만 있다면, 내가 나서는 거야. 대형면허도 딸까 생각하게 돼.....”







<큰엄마의 미친 봉고>는 여자들이 봉고를 타고 ‘단체로 일탈하는' 이야기다. 그것도 명절 전날 아침에 예고도 없이 말이다. 여자들은 부엌에서 잔뜩 쌓인 음식 재료 앞에서 바쁘다. 남자들은 거실에서 모두 한가하게 놀고 있다. 큰엄마에게 큰아빠는 뭘 찾아달라며 자꾸 소리를 지른다. 순간 화면엔 자동차 열쇠가 클로즈업되고 큰엄마는 집안의 여자들을 향해 외친다.


“아이구, 뭐 이렇게 안 산 게 많냐~~ 너무 많이 빼먹었다. 우리 장 좀 보고 올께요~~"


큰엄마와 두 동서, 며느리와 큰손녀에 질부 될 은서까지, 여섯 여자들이 큰엄마의 봉고차를 타고 떠난다. 손자 하나도 끼어 있다. 집에 남은 남자들은 뭘 할까?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전 하나 부칠 줄 모르는 남자들이 연출하는 우스꽝스러운 풍경, 길 위에서 여자들이 써가는 모험 이야기, 그리고 이 두 세계가 ‘라이브’로 연결되어 영화의 재미를 더해 준다.


큰엄마(정영주)가 운전하는 봉고는 노래방이 되고 수다방이 된다. 여자들은 낯선 길로 계속 달리고 운전 교대도 한다. 큰아버지의 카드로 수백만 원 긁어 모두 멋들어지게 새 옷을 사 입는다. 잘생긴 남자 셋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침밥도 먹는다. 그 시각 집에서는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큰아빠가 나자빠지고, 남자들은 서로 탓을 하며 옥신각신한다.


봉고가 마지막으로 멈춰 선 곳은 캠핑장이다. 여자들은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통성명을 한다. 시집에서 불리는 호칭 말고 원래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준다. 솔직한 대화로 문중 땅 판 돈을 둘러싼 오해도 풀린다. 여자들의 꿈과 개성을 이야기하고 연대가 생기면서 집을 나온 진짜 이유도 밝혀진다. 돌아가신 둘째 시어머니의 삭제된 이름을 불러내어 조명을 비춰 준다.






그렇다, <큰엄마의 미친 봉고>를 여성 성장 영화요 페미니즘 로드무비라 말하자.(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길 떠나고 모험하고 성장하는 여성 서사가 얼마나 희귀한가. 여자는 왜, 언제, 집을 떠나는가? 영화는 묻고 있다. 집 나가 방랑하고 외도하고 모험하다 돌아오는 건 남자들에게만 허용된 이야기였다. 여자는 집 떠난 남자를 기다리고 인내하며 집을 지키는 사람이라 했던가.


검은색 봉고차를 탄 여섯 여자들은 떠나야 할 것과 가야 할 데를 안다. 지리멸렬한 일상을 지켜내는 여자를 ‘집사람’으로만 호명하지 말라. 집은 여자의 유일한 처소가 아니다. 미친 봉고처럼 여자들은 질주한다. 길에는 좌절과 분노가 있고 좌충우돌이 있다. 울고 웃고 성찰하며 화해하고 연대하는 길이다. 달라진 여자들이 돌아올 때 가족도 남자들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여자가 집을 떠나는 이야기에 해피엔딩만 있을까. 페미니즘 로드무비 <델마와 루이스>(1991)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전까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로드무비 장르를 여성 서사로 만든 첫 영화겠다. 가부장적인 남편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던 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식당 웨이트리스 루이스(수전 서랜던)가 의기투합해 여행을 떠난다.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며 신나게 출발한 두 여자. 집을 떠난 그들이 꽃길만 가는 건 아니다. 그들 앞에 나타나는 형편없는 남자들에, 집에 있는 남자들까지, 둘의 여행에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이어진다. 두 여자는 강간미수범을 살해하고 현행범으로 경찰에 쫓기게 된다. 그랜드캐니언을 두 사람이 탄 차가 날아오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길 떠나는 여성 서사로 <와일드>(장마크발레, 2015)만 한 영화를 만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셰릴 스트레이드의 원작 에세이도 읽어 보라. 숨이 멎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엄마의 죽음과 이혼으로 삶을 포기하고 살던 셰릴(리즈 위드스푼)은 지난날의 슬픔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극한 여정 4,285km의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킹)를 홀로 걸어서 완주하고 만다.



셰릴 스트레이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일생에 한 번은 모든 것을 걸고 떠나야 할 길이 있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을 길을 만든다."



<콩나물>(윤가은, 2013) 도 페미니즘 로드 무비로 호명하자. 여섯 살 소녀에겐 혼자 집 밖에 돌아다니는 게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다. 할아버지 제삿날 보리(김수안) 혼자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콩나물을 사러 집을 나선다. 소녀를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따라 관객도 길을 떠나게 된다. 보리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관객도 길 위에 있게 하는 로드 무비다.






“와~~ 나도 운전면허 따야지 따야지 하면서 미뤄왔는데, 다시 생각하게 되네?”


“그래! 꼭 1종으로 따. 운전할 수 있는데 차 안 타는 것과 면허 없어서 못 타는 건 달라. 언제든 어디로든 내 힘으로 운전해 떠날 수 있다는 건 힘이야. 힘을 길러야 해.”


영화 토론에서 서로 힘을 실어주던 여자들의 목소리 여운이 길다.


기후 위기에 자동차를 덜 타는 게 맞다. 그럼에도 1종 운전면허를 따라고 서로 응원하는 여자들이다. 그렇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있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목숨을 걸고 길을 떠나는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는 길을 만든다. 길을 떠날 수 있는 여자는 힘이 있다.



여자, 집을 떠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단다. 1종 운전면허도 그중 하나란다.


<큰엄마의 미친 봉고>, 페미니즘 로드무비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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