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2016년 미국의 보수 언론의 대표인 폭스 뉴스를 한방에 무너뜨린 성추행 폭탄선언을 다룬 실화 바탕 영화다. 이듬해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 추문 폭로와 미투(MeToo) 운동으로 이어졌으니, 그야말로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었다. 세상은 어떻게 바꾸는가? "누가 지켜보고 있는가?" 혹은 "누가 보았는가?" 묻는 것이다.
영화 초기 앵커 메긴이 폭스 뉴스의 건물 구조를 안내하는 장면은 암시와 은유로 가득하다. 언뜻 보면 건물 외부와 층별 구조,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화면 변화가 빠르다. 폭스 뉴스의 사장 로저가 얼마나 거물인지, 회사를 어떻게 키웠는지, 거물급 남자들 사진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수많은 모니터 앞에 리모컨을 들고 앉은 로저가 나올 때, 결정적인 멘트가 나온다.
"로저는 언제나 보고 있죠."
그의 눈이 잠시라도 안 지켜보면 배가 기울듯 뉴스가 좌측으로 기운단다. 눈이 보는 즉시 로저는 지시하는 권력이다. "앵커의 치마를 더 짧게 하라, 화장을 더 해라, 바지를 입지 마라, 진행자의 다리를 더 부각해라....." 자막의 오타를 잡아내고는 바로 조정실 직통전화에 대고 소리 지른다. "야 이 머저리들아! 이건 글렌 프레이가 아니라 돈 헨리잖아!"(로저도 그레천도 '글렌 프라이'라고 발음했는데 왜 한글 자막은 '글렌 프레이'일까. 옥에 티다. )
언제나 보고 있는 눈, 그건 시청자가 아니라 폭스 사장 로저라는 소리다. 그 눈이 모든 직원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그 눈이 보고 싶은 걸 보게 해야 한다. 누군가를 좋은 자리에 꽂아 준다. 충성심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 눈이 좋은 대로 보상할 것이라 약속한다. 어떻게 충성심을 보여줄지는 알아서 판단하라, 그 눈이 말한다.
로저 눈이 원하는 대로 폭스의 여성들은 불려가고 희롱당하고 착취당한다. 사장실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몸매를 보여주고 속옷을 보여줘야 한다. 다리를, 벗은 몸을 그 눈이 보게 해야 한다. 폭스 이전에도 그 짓은 계속 있어 왔다. 여자가 성공하려면, "힘센 자의 앞섶을 빨라" 그의 원칙이었다. 그 눈 밖에 나는 자,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눈이 보고 싶은대로 세상이 다 움직여주는 건 아니었다. 그레천 칼슨은 그의 눈이 원하는 걸 거절했다. 그가 겪은 성차별과 성희롱을 낱낱이 기록했고 녹음했다. 로저를 고소했고 그를 사장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영화는 또 다른 보는 눈을 비춰준다. 아이들의 눈망울이다. 간판 앵커 메긴은 세 아이 엄마고 그레천은 두 아이 엄마다. 영화는 두 여성이 직장 성희롱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 아이들을 자주 등장시킨다. 아이들은 엄마를 바라보며 자라갈 뿐이다. 엄마들은 욕을 먹었고 차별을 당했고 희롱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참지 않고 목소리를 냈고, 잘렸고, 싸워야 했다. 아이들은 그 모든 것을 보는 눈이었다.
어느 엄마가 자신이 겪은 치욕을 딸이 겪도록 하고 싶을까?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바꾸고 싶지 않은 여성이 있을까? 엄마들은 그걸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겪은 치욕을 덮을 경우, 딸이 살아갈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레천은 그 점에서 더 단호했다. 청소년 카야의 응시하는 눈을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대사 없는 장면, 눈망울이 말한다.
엄마, 내가 지켜보고 있어. 엄마는 잘 싸우고 있는 거야. 엄마 힘내!
그랬다. 당시 14살이던 딸 카야에 대해 그레천 칼슨은 <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 그는 종종 밤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카야에게 이 세상에서 여성이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할 때도 있다고 말하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딸을 걱정하며 뒤척였지만 그의 딸 카야는 어느 날 씩씩하게 말했다.
"엄마, 애들이 엄마 일을 물어봤어요. 엄마 딸이라서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그뿐 아니다. 2주 뒤엔 자기를 자꾸 괴롭히던 두 여자아이에게 카야는 마침내 용기를 내서 맞섰다며 고백한다.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엄마가 하는 걸 봤으니까.
결국 그거였다. 엄마가 어찌어찌 용기를 끌어모아 중요한 일을 해냈고, 딸이 엄마의 그 행동을 보고 있었다는 거다. 그걸 본 딸은 엄마보다 좀 더 용감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엄마가 하는 걸 봤으니까." 딸의 말에 엄마 그레천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딸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는 나아야했다. 그걸 위해, 그레천은 직접 아이들의 역할 모델이 되어 준 엄마였다. 무섭게 기억할 일이다.
아이들은 다 지켜보고 있다.
다 보았지만 안 본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로저의 아내였고 비서와 부사장들이었다. 로저 부인은 회사에서 또 다른 권력자로서 직원들을 대했다. 로저의 권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용하는 수호자요 수행자였다. 자기 남편을 비호하는 여자 비서와, 그에게 여직원을 데려오는 첩첩의 협력 구조를 묵인하고 그 속에 떡고물을 먹고 살았다. 일이 터졌을 때 그들은 로저를 옹호해야 했다.
"결국 다 깨지긴 하지만. 끝에 나오는 로저 아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허물어진 모습이었죠."
"안희정 부인 생각났어요. 부인을 피해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죠. 부인이 로저의 손에 키스하는 장면에서 로저의 표정이.... 남자를 밑천으로 사는 삶이죠. 부인의 표정을 보며, 또 연기하는구나, 하는 표정이었어요."
"로저 비서가 대단했어요. 그도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가 포주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고. 끝나지 않을 일이다라고도 생각했어요. 빌 클린턴, 빌 게이츠 생각났어요. 알고도 모른척했을 때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나선 소수 이외의 사람들은 다 방관자가 아닌가."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토론할 때 로저 부인과 비서들에 대한 소감은 비슷했다. 로저 같은 권력은 결코 혼자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곁에서 같은 짓을 하며 떠받들고 유지하고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되는 것이다. 비서와 부사장들과 부인. 그리고 팀로저 티셔츠를 입고 로저를 지키고자 한 직원들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다 보았지만 못 본다는 것. 보아도 못 본 것처럼 산다는 점이었다.
지난 3월 2일, 공군 이 중사는 부대 상사의 개인적인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 원치 않은 자리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부대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이 중사는 선임 부사관으로부터 강압적인 성추행을 당했다. 이후 매뉴얼대로 이 중사는 피해 사실을 알렸다. 80일이 되도록 군은 가해자는 보호하고 피해자를 회유 협박하고 전출 보내 2차 3차 가해했다. 이 중사는 싸늘한 주검으로 아직도 영안실에 누워있다.
국방부에 따르면 작년 군내 성범죄는 771건, 월평균 64건이다. 여성 성폭력 피해자의 절대다수가 20대 초반 중사 하사(58.6%)로, 군 경력이 5년 차 미만이다. 남성 가해자는 선임 부사관(50.6%)과 영관장교(23%)가 많았다. 이는 군내 성범죄가 상관의 '우월적 지위'를 매개로 이뤄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와 아내는 그런 대통령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면서 국방부의 수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절박한 한계를 느낀다.
이 중사 아버지의 고백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 국방부의 수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왜 과거형 문장을 썼을까? 스물네 살 딸을 허망하게 잃은 아버지는 군이 사건 처리를 잘 하길 지켜보고 있었다. 손놓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군의 조사에 협조하며 신뢰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절박한 한계를 느낀다고 그는 절규했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피해자 부모가 지켜보고 있다."
"피해자가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군과 국방부, 그리고 정부는 누구 눈을 의식하는가? 지켜보는 부모의 눈을, 부릅뜬 피해자의 눈을 의식하는가 정말이지 소리 질러 묻고 싶다. 잊지 말자.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우리 아이들의 눈을 기억하자.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불공정하게 대하는지, 어떻게 성 평등의 운동장이 무지막지 기울어져 있는지. 아이들은 다 보고 있다. 여성에게 나쁜 짓을 한 남성들이 어떻게 큰소리치고 살아가는지, 무서워할 눈을 제발 무서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