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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Jul 15. 2021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


"만약 여성으로서 당신이 재판관들에게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계급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건가요? 잘 들으세요. 몇 년 뒤에 극동에서, 조선에서, 중국에서, 전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입니다. 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이다." (225-226쪽)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김금숙, 서해문집, 2020)




오랜만에 안산 한살림 마을모임 '책살림' 이야기 올려봅니다. 코로나 시대 '책살림'은 쉼 없이 줌으로 매달 한 번씩 만나고 있답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자유롭게 수다 떨며 울고 웃는 토론모임이죠.



7월 모임은 14일(수) 저녁 9시,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로 토론했어요.(왜 그렇게 늦게? 아이들 재우고 나서.) 책 제목 어때요? 낯선가요? 김알렉산드라는 2009년에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사람이죠. 정철훈 원작의 <소설 김알렉산드라>를 김금숙 작가가 2020년에 그래픽 노블로 그려냈답니다. 아이 어른 함께 볼 수 있는 만화책이랍니다.





독립운동가 중 여성 이름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워낙 여성들의 활동 자체가 과소평가되고, 대표성과 영광은 남성이 차지하던 우리 문화 탓이 크죠. 남성과 함께, 그리고 그들보다 더 용감하고 씩씩하게 목숨 걸고 활동하다 간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성은 그저 그림자 노동하도록 강요받았고요. 그동안 덮이고 삭제되고 지워진 여성 독립운동가들 이름은 하나씩 되찾고 드러나고 있다는 데 의미가 크죠. 더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요.



김알렉산드라(1885~1918)는 러시아제국 시베리아의 한 한인 마을에서 태어났죠. 아버지 표트르 김(김두서)이 거기서 통역관이자 노동자로 활동했거든요.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김알렉산드라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여성 사범학교에 입학해요. 거기서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심취하죠.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해 통역하며 노동자의 대변인이요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의 길을 가게 됩니다.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남한에선 그 이름이 지워졌던 사람이랍니다. 100년 전 우리 민족의 상황을 돌아봅니다. 조금이라도 글 줄이나마 읽고 세계정세에 깨어 산다면 사회주의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던 시대였죠. 지금 이 시대보다 훨씬 치열하게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길이었고요. 자기 몸 던져 함께 나라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어느 날 분단된 나라에선 서로 '적'이 돼 버린 겁니다.




김알렉산드라의 행적을 따라가노라면, 낯설고도 익숙하며, 멀고도 가까운 우리 민족의 모습과 여성의 삶을 함께 읽을 수 있어요. 예리하게 자신을 벼리고 싸우며 사는 삶이 보이죠. 어떤 꿈을 꾸어야 할지 알고 가던 사람. 너무 짧은 33년 생애를 조국의 독립과 노동자 해방을 위해 불태운 분. 두 아이의 엄마이면서, 엄마라서 이 길을 더 포기할 수 없다 했어요. 자식들은 더 나은 세상에 살게 해야 했으니까요.



줌으로 만난 책벗들 네 사람도 모두 같은 고백을 했어요. 이번에 김알렉산드라를 처음 알게 되었노라고요. 그만큼 우리는 분단체제에서 교육받고 자란 사람들인 걸 실감했어요. 살짝 소름이 끼칠 정도였죠. 남한은 남한대로 북은 북대로, 각자 자기 체제에 유리하게 역사를 기술하고 가르쳤으니까요. 김알렉산드라가 역사 교과서에도 남한의 어떤 책에도 등장하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았던 겁니다.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그 투쟁과 수고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했던 말이 얼마나 결연한지요. "여성이니까?" 이 목소리가 귀에 자꾸 울리는 거 같아요. 여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안 보던 시대였으니까. 여자니까, 이러면 되고 그러면 안 되고, 여성이니까, 이러면 봐 줄게, 여자니까, 여성이니까..... 김알렉산드라는 그런 말을 모든 여성에 대한 모욕으로 들었어요. 한 인간으로서 할 일을 한 겁니다. 자식들은 더 나은 세상에 살게 해 주려는 엄마이자 인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싸움을 하라 하죠?


안 싸워도 되는 세상이면 가장 좋겠지요. 싸움을 누가 좋아할까요?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금은 무얼 위해 싸우고 있나요? 왜,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조차 혼란스러운 시대 아닌가요? 더구나 "여성으로서" "여자니까" 이런 말은 결국 싸우지 말라고 할 때 쓰이고요. 김알렉산드라가 오늘 이 땅에 온다면, 아마도 강성 페미니스트로 날마다 욕을 옴팡 뒤집어쓰며 살고 있겠지요.



"여자니까, 참아." "여성으로서, 그러면 안 되지."


아직도 심심찮게 들리는 말입니다. 성에 근거한 차별은 차별인 줄도 모르는 세상. 여성에게 마음대로 함부로 말해도 별 죄가 안 되는 세상. 김알렉산드라가 살던 100년 전 그 시대와 오늘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모욕을 칭찬인 줄, 혐오를 애정인 줄 아는 세상이죠. 평등 세상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간 김알렉산드라. 그는 뒤에 올 수많은 여성들의 명예까지 생각하며, 페미니즘을 몸으로 살아낸 사람 아닌가요?





그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결코 세계의 절반인 여성들을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모독하지 않겠노라고. 그랬습니다. 두 눈 부릅뜨고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세상과 마주했더군요. '죄인'으로 죽음을 맞는 게, 용서를 빌고 사는 길과 비교할 수 없는 떳떳한 길이었어요. 자기의 죽음까지도 똑똑히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고 말했죠. 결코 세상에 대해 눈 감고 살지 않았듯, 죽음까지도 두 눈 뜨고 마주했어요.



내 눈을 천으로 가리지 마라. 나는 죽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책살림은 8월에도 변함없이 고고합니다.


18일(수) 저녁 9시 역시 줌으로 토론해요. 한 달 한 번 밖에 못 만나니, 한 달 한 권 읽는 책, 쉬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랍니다. <아무튼 비건>(김한민, 위고, 2018)으로 8월에 만납니다. 이 기후 위기 시대에, 갈수록 비건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주제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기후 위기에 응답하고 행동해야 하니까요. 눈 감고 회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기로 했답니다.



'책살림' 토론 모임에 관심 있는 분들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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