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 딜릴리가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 오렐이랑 친구가 되는지 의아했고 딜릴리 나이도 궁금했어요.
정 : 그 모든 편견을 깼다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나라는 나이가 중요해서 친구가 되려면 나이부터 까고 봐요. 나이 차이가 나면 불편해지는 거죠. 딜릴리가 너무 똑똑하다고 보는 것도 우리나라는 아이를 매우 미숙하게 보기 때문인데, 배울 게 없고 가르쳐야 할 존재로 보는 거죠. 그 아이들을 통해 배울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딜릴리를 통해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나이만 어릴 뿐이지 하나의 독립되고 완성된 인격체고 결코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딜릴리를 통해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류 : 감사해요. 이해가 너무 잘 되네요.
조 :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저는 영화 내내 딜릴리의 나이가 궁금한 거예요. 민증부터 까는 성격이거든요.
-울림 씨네 페미니즘 <파리의 딜릴리> 토론 중에
영화 <파리의 딜릴리>는 흑인 소녀 딜릴리가 끌어가는 영화다.
많으면 7-8세 정도 돼 보인다. 딜릴리와 짝으로 함께 파리를 누비는 오렐은 백인 남자다. 그는 10대 후반~ 20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다. 두 사람은 나이와 성별과 인종과 사회적 지위 등, 도저히 같은 게 없다. 그런데 격의 없는 친구가 될 뿐 아니라 그 시대 활동한 수많은 예술가들과도 스스럼없이 만나 대화하고 친구가 된다.
줌 영화 토론 중에 딜릴리와 오렐의 나이를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흥미롭지 않은가? 나도 궁금해서 자꾸 상상했더랬다. 영화 시작부터 어린 딜릴리에게 다가온 오렐의 정체가 궁금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혹시 오렐이 딜릴리를 해코지하려 접근하는 거 아닌지 의심의 눈으로 봤다. 마스터맨이 등장할 즈음에야 내 기우요 편견임을 인정하게 됐다. 인간 조건 상관없이 사람과 사람으로 친구가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딜릴리는 흑인과 백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다. 고향인 뉴칼레도니아에서는 피부가 너무 '희다'더니 파리에서는 너무 '검다'는 소릴 듣는 아이다. 인권운동가 루이즈 미셸이 유배지에서 만나 함께 파리로 오게 된 딜릴리.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하고 자유와 평등을 몸에 익힌 자유로운 영혼의 딜릴리다. 그 친구 오렐은 요즘 식으로 하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청소년 알바쯤 되겠다.
두 사람을 친구로 묶어준 건 역설적이게도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 없는 '소수자'라는 공통점일 것이다. 수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를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당대의 '대단한' 인물들을 만나고 모험했다. 두려움 없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서로 이름 부르는 친구 될 수 있는 세상. 과연 벨에포크 아닌가.
2. 벨 에포크, 누구에게나 좋은 시대였을까?
<파리의 딜릴리>에는 벨에포크 시대 활동했던 예술가와 학자들이 76명이나 등장한다. 그 많은 인물 하나하나 살펴보고 생각하자면 토론 시간이 76일이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만큼 토론 참여자들에게 인상적인 사람도 다양했다. 영화에 등장한 당대 실존 인물들에 대한 참여자들의 감상을 조금씩만 옮겨 본다.
박 : 영화 보기 좀 전에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까미유 끌로델이 로댕의 제자인데 섬세한 묘사는 다 까미유 끌로델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지옥문도 섬세한 묘사는 다 그녀가 했을 것이라고 나와있어요.
심 : 마리 퀴리, 엠마 칼베, 루이즈 미셸, 사라 베르나르. 그 시대에 살았던 위대한 여성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다시 주목하게 하는 감독의 배려가 좋았어요. 루이제 미셸은 굉장한 페미니스트였어서 그 사람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봤으면 했어요.
조 : 로트레크라는 화가를 주목했어요. 그 사람의 그림이 좋았어요. 드가의 칭찬을 받고 좋아하는 장면을 보면서 드가와의 관계가 궁금했어요.
정 : 저도 로트레크를 하고 싶었어요. 그림도 유명하지만 장애인이라 놀림당하고 소외돼서 물랭루주에 가서 무용수와 매춘부 그림을 그리고 포스터를 그리면서 돈을 벌었는데 나중에는 물랭루주 물갈이를 해야 한다고 그곳에서도 쫓겨났다고 해요. 영화에서 딜릴리와 오렐과 함께 친구처럼 다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무것도 따지지 않죠.
김 : 콜레트요. 남편의 이름으로 소설을 썼다가 본인의 이름을 찾아간 멋진 여성이에요. 저도 영화<콜레트> 재미있게 봤어요.
심 : 에릭 사티가 그노시엔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 어떤 흑인이 춤을 추는데 그 흑인한테 로트레크가 ‘쇼콜라’라고 불렀어요. 진짜 이름이 쇼콜라인 건지, 까맣다고 초콜릿이라는 비하인지 잘 모르겠어요.
나 : 저는 까미유 끌로델인데요, 잠깐 나와서 아쉬웠어요. 제가 중. 고등학교 때 그녀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동경을 일으켰던 인물이었어요. 인상 깊게 남은 인물이었습니다.
정 : 아까 언급되었던 ‘쇼콜라’가 실제로 벨 에포크 시대 활동했던 유명한 광대였다고 합니다.
-울림 씨네 페미니즘 <파리의 딜릴리> 중에
그렇다. 영화는 질문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되고 예술과 문화가 꽃 피던 그 시절은 '벨에포크'라 불린다. 좋은 시대 맞다. 딜릴리와 오렐의 눈, '소수자'의 눈에도 좋은 시대였을까? 좋은 시대의 이면, 지하세계의 어두움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야 만다. '마스터맨'과 '네 발', 거긴 결코 '좋은 시대'가 아니었다.
여성이 대학에 가고 권리를 주장하는 꼴을 볼 수 없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나 그랬다.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믿음, 여자는 남자 아래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게 본분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 좋다는 시대에 여자아이들은 안심하고 밖에 나다닐 수도 없었다. '마스터맨'들이 여자들을 납치해서 감금하고 폭행했으니까. 네 발로 기어 다니며 남자들의 지배하에 고분고분하도록 길들여지는 지하세계가 있었다.
좋은 시대의 이면인 마스터맨 범죄 조직을 영화는 여성들이 직접 접수하게 한다. 경찰도 국가도 부패하고 무능하고 속수무책이었다. 엠마 칼베, 마리 퀴리, 루이즈 미셸, 사라 베르나르, 네 명의 여성이 힘을 합쳐 마침내 감금된 여자들을 해방한다. 아이들을 부모 품에 돌려보내고, 여자들이 두 발로 당당히 걸어 다니게 한다. 그 과정에 소년과 소녀, 한 명의 '전향한' 성인 남성, 그리고 너와 나 모두 하나가 된다.
<파리의 딜릴리>를 벨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이유가 뭘까?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시대는 없었다. 그래서 영화는 벨에포크 시대를 소환하는지도 모른다. 좋은 시대의 이면을 들추고 불편한 지점을 보여준다. 진짜 좋은 시대를 상상하게 하고 꿈꾸게 하는 영화다. 여자와 아이와 '소수자'들에겐 그 좋은 시대가 여전히 좋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좋은 세상을 함께 꿈꾸자고 제안하는 영화다.
3. 누구나 반말하고 친구되는 세상을 꿈꾼다
영화 속 딜릴리와 오렐처럼, 예술가들처럼, 인간 조건 상관없이 서로 친구되는 세상,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 우리 언어문화는 이런 친구 맺기를 방해하는 거 같다. 중년이 되고 보니 더 절감한다. 어떤 '재수 없는 날'엔 모임에서 '왕 언니' 소리를 듣는다. 왜 나이로 굳이 사람을 줄 세워야 하는가. 가까운 사람들과 서로 반말하면 왜 안 되느냔 말이다.
한때는 상호 존대가 가장 편했던 적도 있었다. 공적인 사회생활에선 그게 맞다. 가까운 사이에서 굳이 반말과 존댓말로 다르게 하는 관계가 나는 점점 불편하다. 나는 짝꿍과 서로 이름으로 부르고 반말로 바꿨다. 결혼 25년간 존대하다가 반반 섞다가, 서로 온전히 반말하며 산 지 6년 차다. 세 아이들과도 어느 날 약속했다. 더 나이 먹더라도, 사위 며느리들이 와도, 계속 엄마 아빠와 서로 다 반말하기로 결의했다.
모두 평어 쓰는 모임에선 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나이와 성별과 사회적 지위 막론하고 서로 반말로 친구가 된다. 내가 진행하는 토론 모임에서 공식적으로 서로 반말하기로 한 이유다. 장벽 없는 평어 해방구의 연습이다. 안산 여노 토론 모임 '이프', 한살림 독서 모임 '책살림', 그리고 서울의 토론 모임 '백합과 장미'가 그렇다. 덕분에 나는 20대부터 60대까지 서로 이름 부르며 반말하는 친구를 많이 얻게 됐다.
지난주 미국에서 내 친구가 H가 들어왔다. 나보다 두 살 적은 대학 후배이자 친구다. 아직 서로 존댓말 하는 사이인데 내가 계속 제안하고 있다. 이제 서로 반말하자고. SNS로 반말하자는데 못한다는 친구로 인해 나는 슬퍼지곤 했다. 이번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나와 확실하게 반말하는 친구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나이, 성별, 인종, 사회적 계급, 종교.....
생각보다 이 세상엔 장벽이 많다.
한국의 언어문화는 특히나 남녀와 노소에다 지위와 계급까지 민감하다.
시대가 변하는데 언어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나와 서로 반말하기에 성공한 내 친구들의 고백이 위로요 희망이다. "이 맛에 자꾸 반말하자고 그랬구나!" 훨씬 자유로운 공기 평등의 공기를 느낀다는 고백이다. 20대도 50대도, 나이 상관없이 다 같은 고백이었으니, 믿어도 되는 거다. 다만 익숙한 걸 깨고 다시 시작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왜 나이 상관없이 서로 반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딜릴리와 오렐처럼 자유롭게 반말하면 왜 안 돼? 내가 친구들한테 들은 이유는 많고도 많아 보였다. 몇 개만 정리해 본다.
"난 아직 그렇게까지 친해지고 싶은 맘 없나 봐요. 존댓말 로도 친하잖아요."
"존댓말이 서로를 적당한 거리로 지켜줘요. 이게 익숙해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문화를 따라야죠. 어떻게 다 반말해요."
"나이 차이가 많아서 존댓말이 더 자연스럽고 좋아요."
"너무 버릇없어 보여요. 서로 함부로 막 대하면 어째요."
"존댓말을 한다고 친하지 말란 법 없잖아요."
..... 등등등.
남녀노소, 인간 조건을 넘어 반말하고 친구되는 사람들이 있다. <파리의 딜릴리>는 그래서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