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이 정한 올해 여성의 날 주제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오늘날의 성평등"이다. 코로나를 겪으며 이제 지속가능한 미래란 하루도 잊을 수 없는 화두가 됐다. 우리는 과연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오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오늘 성평등을! 백번 맞는 말이다. 지금 여기서.
이 주제를 받아 제37차 한국 여성대회가 정한 주제가 아름답게 울린다. "모두의 내일을 위해 오늘 페미니즘" 들리는가? 페미니즘이 무슨 마귀라도 되는 양 벌벌떨고 혐오하는 사람이 감히 대통령을 하겠다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젊은 남자와 여자를 갈라치며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에게, 여성들이 당당하게 외친다. "모두의 내일을 위해 오늘 페미니즘합니다."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올해 여성의 날은 내게 또 하나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내 책이 세상에 나왔을 수도 있는 날이라서다.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는 호기로운 제목으로 원고를 출판인에게 넘긴 게 한 달 전이었다. 가까운 벗들에게서 추천사까지 열심히 받았다. 2월 10일엔 "내 책에 추천사를 써 준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이제 한 달 후면 내 책이 나올 거라며 요런 단서를 붙였더랬다
"큰 문제 없이 진행되면 올해 3.8세계 여성의 날은 내 책 출간과 함께 '따따블로' 축하하며 보낼 것이다."
책이 나오게 된다면서 왜 나는 "큰 문제 없이 진행된다면"이란 사족을 달았을까? 내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 책을 출판하자고 먼저 내민 손이 있어서 내가 잡긴 했는데, 어디까지 갈지 그림이 잘 안 그려지는 상황이었다. 그 사람이 3.8에 책이 나오게 한다 그래서 나도 그런 줄 알았다.
모든 건 내가 세상을, 그리고 출판을 너무 몰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막연히 1인출판사려니 믿은 건 내 착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1차 가제본을 보러 오라는 날 갔더니 책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다. '인디자인'에 내 원고가 흘러들어가 있을 뿐 전혀 책이 될 길이 안 보였다. (그의 명예를 위해 자세힌 못쓰겠다.) 부랴부랴 어찌어찌 저녁에 가제본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 안 했음 좋을 걸 나는 목도하고 경험하고 말았다.
그다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졸지에 편집자인양 가제본을 깨알같이 수정해야 했다. 편집일 해본 딸과 아들에게 보여주니 모두 '쓰레기'라 했다. 2차 만남 약속 전날 밤 나는 전화로 수정할 내용을 정확히 알렸다. 그는 대뜸 내가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며 못하겠다고 '나자빠졌다'. 자기는 '운동'으로 '선의'로 하는 거지 그렇게 '높은 수준'을 들어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실화냐? 참 부끄럽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더러 '인디자인' 깔고 편집하라 할 때 사실 의심스러웠더랬다. 나는 그와 책 한 권 내게 되면 인디자인을 배우든 결정하겠다고 분명히 내 뜻을 밝혔다. 내 불안은 근거 없는 게 아니었던 거다. 돌아볼수록 그는 솔직하지 못했다. 나 역시 솔직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영부영 끌려가다 이런 파국에 도달한 것이다.
나를 위해 급히 추천사를 써 주느라 애쓴 분들께 너무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뜨겁게 감사한다. 현선, 용선, 가현, 순천, 정숙, 그리고 간벗 강병주 선생과 내 짝꿍 덕이까지. 3.8이면 책이 나온다고 큰소리친 게 민망하고 부끄럽다. 나를 응원하고 축하해 준 모든 분들께, 책 나올 걸 기다리노라 응원해 준 독자들께 죄송하단 말을 하고 싶다. 아무 말 대잔치로 떠벌이며 나를 끌어들인 그나, 덥석 응한 나나, 도긴개긴이었다.
비록 책은 다시 원점이지만, 오늘을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진심으로 '따따블로' 축하할 이유가 더 많이 보인다. 나를 돌아보며 다시 시작할 수 있잖은가. 큰아들 놀릴 때 많이 쓰던 말이 떠오른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알겠냐?" 맞다. 나도 그런 사람인 걸 인정한다. 찍어 먹어보고서야 알겠는 걸 어쩌겠나. 나에 대한 아픈 배움의 시간이었다.
나는 왕초보 작가로서 출간까지의 과정이 막막했다. 아무리 원고를 열심히 쓰면 뭐하나. 잘 맞는 출판사와 편집인을 찾는 건 또 다른 과제였기 때문이다. 익히 들어 온 그 과정. 수없이 출판사 문을 두드리고 거절당하고 다시 도전하고 기다리고.... 내 글을 알아봐 주고 책 내자 제안해 오니, 출판사 목록 정리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내 앞에 지름길이 나타난 줄 알았으니까. 그 길은 그러나 막다른 길, 꽝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인정한다.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라는 글을 썼다고 계속 나 스스로 잘 간다는 말은 아니란다. 스스로 찾고 두드리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온 지난 시간은 크나큰 복이었다. 앞으로 다시 가 본 적 없는 길을 가려면 다시 길을 잃지 말란 법 없다. 내 몸의 소리, 내 마음의 소리를 내가 저버리기 얼마나 잘하는가. 내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는 건 역시 길이 아니었다. 나는 길치로서 다시 출발선에 홀로 섰다.
둘째, 내가 페미니스트 라벨링으로 사람을 판단했다.
내 책을 출판하자고 덤빈 그를 내가 덥석 받아들인 근거엔 그가 페미니스트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어려운 개인사 중에 페미니즘 운동을 하며 작은 단체를 이끄는 사람. 그를 몇 년 전 어느 여성 대회에서 알게 된 후 나는 연민과 연대의 마음을 느꼈다. 그가 공간을 얻어 고군분투하는 걸 알고 짝꿍과 둘이 직접 찾아갔고 회원으로 가입하고 소액 후원자가 되었다. 그가 내 글이 좋다며 책 내자는데 내가 거절할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니까, 내 안에 있던 '편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기독교인이면 믿을 만하다, 유대인은 똑똑하다, 민주주의자는 깨끗하다, 이런 편견의 원리가 내게 작동한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를 마녀 취급하는 편견이나, 페미니스트면 믿을만하다는 편견이나 나쁘긴 마찬가지 아닌가. 출판인으론 어떤 확인도 없이 내 책을 맡긴 셈이었다. 억지춘향을 끝내며, 나는 후원을 철회하고 그를 '손절해' 버렸다.
셋째,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 아침에 다시 인정한다. 어리석은 판단과 선택이었음을. 올해 내 기도 제목의 열쇳말인 '어린아이'가 떠오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살 수 있을까. 꽉 막히고 답답하고 오만하고 무서운 사람 말고 어린이처럼 되고 싶었다. 뭐든 새로 보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고 배우고 자라고 싶었다. 어떻게? 누군가 질문하는 거 같다. 쪼끔 아는 걸로도 이다지 막히는데? 과연 어린아이 같이?
이 모습 이대로 허접한 나를 인정하련다. 마음 한구석엔 감사한가 하면 무섭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라는 이름, 페미니즘이라는 말, 내가 아는 줄 함부로 쓸까 진심으로 두렵다. 한마디로 정의하기도 어려운 개념들을, 쓰는 순간, 나부터 기표와 기의는 불일치하는 걸 얼마나 보았는가. 편견으로 페미니스트 낙인찍는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분노했던가. 그러나 나도 다른 면에서 보니 그랬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맞다. 부끄럽고 미안하다.
3.8세계여성의 날 아침, 내 안의 편견과 오만과 선민의식을 마주한다.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지난 한 주 출간 기획서와 책 원고를 40여 출판사에 이메일로 보냈다. 그중 10개 정도의 '검토하고 답하겠다'라는 회신을 받았다. 전화도 받았고 내부적으로 1~2주 걸리니 좀 기다려달라는 메일도 있었다. 의례적인 회신이겠지만, 혹시 아는가, 새길이 보일지. 역시 난 모르는 길을 부딪치며 알아가는 맛을 즐기나 보다.
나도 눈감고 부인하고 싶던 나를 대면하면서.....
3.8세계여성의날이 올해 내게 특별한 이유였다.
3.8 여성선언
돌봄․연대․정의
모두의 내일을 위해 오늘 페미니즘!
여성과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가 정치가 되고 증오와 선동의 정치가 만연한 대한민국에 살고 계시는 모든 페미니스트들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3년 차에 접어든 코로나19 전염병 상황으로 인해 삶의 조건들이 더욱 척박해졌습니다.
온 생애 동안 구조적 불평등과 성폭력, 여성혐오를 직접 경험하고 목격했지만 그 현실이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는 모든 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여성과 자연의 착취에 기반한 ‘성장’ 패러다임에서 돌봄중심 사회로 전환할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뿌리 깊은 성차별적 사회 구조는 여전히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장기화된 코로나19 감염병과 대응 과정은 한국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돌봄의 책임과 역할이 여성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 가장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직군에 있어서, 아이를 돌보기 위해 육아휴직을 냈다고, 아니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는 일터에서도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입니다. 더 쉽고 빈번한 해고 위기에 처하고,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습니다.
여성을 돌보는 혹은 돌볼 사람으로 전제하는 노동시장의 성차별이 없어져야 합니다. 성별, 외모, 고용 형태, 피부색, 장애유무, 나이 등에 따라 차별받거나 눈치를 봐야 하는 일터가 아닌, 내가 원하는 노동을 원하는 만큼, 정당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등한 일과 생활, 돌봄이 가능한 삶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인도 피해도 성차별적인 기후위기,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한 기득권, 남성, 엘리트 중심 성장과 발전 패러다임의 환상을 거두고 ‘돌봄’ 중심으로 사회경제체제를 바꿀 것입니다. 우리는 여성에게만 강요된 돌봄을 누구나 돌볼 권리와 돌봄을 받을 권리가 평등하게 보장되는 돌봄 중심사회로의 전환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모두의 평등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위해 젠더 정의를 실현할 것입니다.
여성과 소수자의 삶을 지워버리려는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모두의 내일을 위한 중요한 방향키입니다. 정부 정책은 이성애 ‘정상’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1인 가구, 비혈연 가구, 탈가족 청(소)년, 한부모 가구 등 저마다의 특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을 포괄하지 못하고, 또 다른 배 와 차별을 낳고 있습니다.
헌법적 가치인 성평등을 국가의 기본 운영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성별, 인종, 성적 지향, 고용 형태 등과 같은 잣대 대신 모든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평등한 시민으로서의 삶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이성애 가족에 속하지 않더라도 보건복지 시스템을 충분히 누리고, 모두가 적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복지체계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는 가정과 일터, 온라인과 오프라인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인터넷과 기술의 발달로 생활에 편리함을 주는 수많은 플랫폼이 개발되고,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진 시대, 그 이면에는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는 콘텐츠와 사이버 불링이 생산·확산되는 현실이 존재합니다.
불법 촬영물과 불법 딥페이크 영상이 매일 재생산·소비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는 오늘도 안전하기를 기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여성들이 여성혐오와 성폭력, 성차별로 죽지 않는, 젠더 폭력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차별과 폭력 없는 모두의 평등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 것입니다.
페미니스트, 모두의 내일을 위해 연대할 것입니다.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과 싸우고, 서로 연대했습니다. 성평등은 생물학적 성별인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모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차별과 혐오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 ‘나’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든’ ‘여성’이라서, ‘이주여성’, ‘장애여성’, ‘한부모’라서, 일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든 존재들과 연대하고 일하는 모두의 노동권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남성의 경험과 관점으로 재단된 여성폭력의 의미를 젠더관점으로 전환하고 마침내 젠더기반 폭력을 끝장낼 것입니다. 우리는 여성주권자의 이름으로 정책에 젠더관점이 반영될 수 있도록 성평등 정부가 필요함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3월 9일,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팔아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는 남성 독점 기득권 정치를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성평등을 향한 연대가 모여 한국사회의 변화를 만들어왔고, 더 큰 변화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모두의 내일을 위해 페미니스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깨부수기 위해 페미니즘을 외칩니다. 모두의 내일을 위해, 오늘 페미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