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을과 내 마음을 책과 함께 부치며
10월의 아름다운 아침이다.
계절은 늘 나보다 앞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이제 온 세상이 가을의 한가운데로 더 깊이 깊이 들어갈 것이다. 단풍이 낙엽이 그리고 가을바람과 하늘이 따라오라며 내게 날마다 손짓할 것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하면서도 아직 가야 할 길을 바라보게 하는 계절 10월. 감사하고 기도하며, 사랑하고 용서하며, 글 쓰고 소통하며, 더 깊은 꿈을 꾸게 하는 계절 10월이다.
10월의 엽서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게요
좋아한다는 말 대신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기도한다는 말 대신
탱자의 향기를 드릴게요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 없이 부칠 테니
알아서 가져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
햇살 고운 10월의 아침 창가에서 읽은 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계절을 부치고 싶은 맘, 그걸 알아주는 시가 고맙다. 사람의 필설은 때로 얼마나 불완전하고 모자라는지. 어찌 말로 다 하며 글로 다 쓸 수 있으랴. 더구나 이 멋진 가을을 말이다. 몸으로 살아내고 마음으로 느끼고 누리는 것 말곤 잘 모르겠다. 매일의 일상이 글이고 기도고 예술이라고 내가 둘러대며 사는 이유다. 몸으로 기도하며 글 쓰는 10월의 아침이다.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 없이 부칠 테니
알아서 가져가실래요?
먼 데로 책을 부치느라 우체국을 자주 드나드는 요즘이다. 우표 없이 부칠 테니, 부친다는 말에 내 마음이 오래 머물고 있다. 곧 내가 좋아하는 단감이 아재의 마음과 함께 부쳐올 계절이라 더 신난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치고 받는다는 것에 대해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순 있겠다. 어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우체국에서 누런 봉투에 또는 상자에 책을 포장하고 저울 위에 얹었다. 창구 직원이 나를 알아볼 정도지만, 그는 어김없이 내게 정확히 물었다.
"속에 든 게 뭐죠?"
나는 책이라고, 매번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그러곤 속으로 덧붙여 말하곤 했다.
"제 마음인데요?"
10월의 엽서는 우표는 없지만 가을도 부치고 마음도 부친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치는 마음. 나는 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가까이 연결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다. 물건을 부치는데 실은 마음을 부치는 게다. 오래 고립되어 힘들게 지내던 한 벗이 내게 연락 왔을 때, 그리고 책을 부쳐달라고 했을 때, 나는 알았다. 나는 벗의 마음을 받았고 지금 내 마음을 부치고 있다는 것을.
어제도 찬란한 가을 햇볕을 쬐며 우체국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친정 엄마에게 책 세 권을 부쳤다. 딸이 보낸 책을 폭풍감동으로 읽은 후 엄마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단다. 내가 어떤 딸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는 교회 분들이었다. 선물로 몇 권 보내드리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엄마 친구들이 내 책을 사서 읽으면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주문한 엄마 친구들에게 내 마음도 부쳐드렸다.
오후엔 고향 친구 정애한테서 톡이 왔다. 저녁 모임에 선물로 돌리려고 서점에 들렀는데 책이 없더란다. 포항이 시골이라 그렇다며 저자가 책을 부치란다. 여성 단체 회원들이 산 공동구매 가격으로 부쳤다. 책을 부치며, 어린 시절 시골에서 같이 자란 추억으로 내 마음이 달려갔다. 삶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로운가. 홀로 무소의 뿔처럼 가는 즐거움이 있고 연결되고 소통하는 기쁨이 있다. 10월은 두 가지를 다 주는 계절임에 틀림없다.
'가을의 엽서'는 꼭 멀리 부쳐야 맛이란 건 아니다. 책 덕분에 책 핑계로 오랜만에 옛 동창들도 만날 수 있었다. 커피 마시며 아줌마 친구들과도 뭉칠 수 있었다. 전에 받은 책에 대한 답례품으로 전달할 수도 있었다. 우리 동네 이웃들과 마음을 나눌 기회도 됐다. 한 동네에 26년 넘게 살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는 도시의 삶이었다. 다행히 단골 가게들이 있었다. 사장님들께 책 한 권씩 팔자! 충동이 일었고 나는 행동으로 옮겼다.
긴 세월 드나든 단골 고객과 사장님의 새로운 만남이었달까. 이 좋은 책을 아는 이웃과 나누지 못할 이유가 없잖은가. 서로 더 가까운 친구가 되면 금상첨화렸다. 들르면 수다도 떨고 편히 인사하며 지나는 가게는 네 개로 추려졌다. 프레쉬 채소과일 가게, 우리동네 커피공장 카페, 제이미의 정원 꽃집, 그리고 의류상가에 있는 아웃도어 가게. 나를 어렴풋이 알뿐, 뭐 하는 사람인지 이제 알게 됐다니, 과연 내 마음을 부치는 빅 이벤트였다.
"사장님, 오늘은 다른 일로 들렀어요. 제 책이 나왔거든요.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 어때요? 예쁘죠? 사장님한테 추천하려고요. 한 권 사서 읽어주십사 하고 들이밀어요. 사장님 매일 바쁘게 일하시느라 서점 가실 시간도 없을 테고, 인터넷 책 검색하실 일도 잘 없을 거 같죠? 그냥 한 권 드리면 좋겠지만.... "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책을 받아든 사장님들. 계좌이체로 현금으로 값을 지불했다.
채소 가게 사장님은 내가 건강한 게 기뻤는데 책이라니, 작가 응원금이라며 2만원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제이미의 정원 사장님은 우리 동네 커피공장에 책을 좀 갖다 놓고 팔면 어떤가 제안까지 했다. 카페 사장님은 평소 책 읽을 시간 없는데 억지로라도 읽어야겠다며 응원 메시지까지 남겼다. 아웃도어 사장님은 소문내고 추천하마 격려했다. 한 동네 오래 살면서도 이웃 친구와 못 놀아 아쉬웠는데, 뜻밖에도 즐거운 시도였다.
한 동네에 오래 살면서도 이웃과 친구하기가 쉽지 않은 게 도시의 삶이다.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다. 전세에 월세살이지만 한곳에 오래 살다 보니 마을의 의미를 조금 배운다. 내 책을 읽어주고 나를 조금 더 알게 될 사장님들과는 이제 더 이웃이 된 기분이다. 이제 가게 들르면 책 몇 쪽 읽었냐, 이야기 좀 들려달라, 또 수다떨겠지. 귀찮은 단골이라고 그만 오라 하려나? 그럴 리가!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 책이 널리 팔리고 읽히길 소망해 본다. 책이 다니는 곳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면 좋겠다. 소통해 보면 알게 된다. 나 혼자만 고민한 게 아니란 걸. 어디선가 고뇌하는 누군가가 새 벗을 얻고 새 걸음을 내딛길 응원해 본다. 나는 세상에게 내 마음을 부쳤다. 내 마음을 받아 함께 할 마음이 고맙다. 모두가 벗이 될 수 있는 눈부시게 고운 10월이다.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