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 감정노동, 그리고 근로기준법

영화 <다음 소희>로 일하는 여성, 감정노동, 근로기준법을 묻다

by 꿀벌 김화숙

환갑이 넘어서야 내 눈으로 노동법(근로기준법)을 처음 읽었다.


"이 법은 헌법에 따라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며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근로기준법 제1조(목적)


목적부터 덜컥거리며 읽었다.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 보장, 향상, 그리고 국민경제의 발전”이 나란히 배치된 게 눈에 들어와서다. ‘보장’은 뭐며 ‘향상’에다 국민경제 발전? 이것들이 한 목적으로 묶일 수 있나? 노동자로 살면서 겪어봐서 말이다. 날마다 시간에 쫓겨 일하는데 생활 향상은 고사하고 기본 생활 보장도 어려운 현실. 게다가 ‘국민경제 발전’이란 명목이면 노동자의 권리 따위 쉽게 제한될 수 있음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럴 것이다.


평생 노동하는 인간으로 살면서도 왜 나는 노동법을 스스로 공부한 적이 없을까. 군사독재 시절 학교에 다녀서, 라는 변명이 떠오르지만 영 궁색하다. 학교에서 배운 건 평생 공부의 빙산의 일각도 못 된다 했잖나. 근로계약서를 몇 번 서명했지만, 근로기준법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내 몸에 대해 무관심과 무지로 살았으니까. 부끄러움은 피할 수 없는 내 몫이었다.




1-3.jpeg?type=w1


계기는 영화 <다음 소희>(정주리 감독)였다. 지난 2월 말 개봉관에서 보고 나오며 꼭 다시 보리라 다짐할 정도로 인상적인 영화였다. 스트리밍에 올라오자 바로 보고 이번에 또 보았다. f안산 여성단체 '울림'에서 노동절 축하 영화토론을 내가 진행한 덕분이었다. 영화를 살피다 보니 노동법까지 읽고 생각하며, 논제를 만들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복까지 꾸러미로 누린 셈이다.


<다음 소희>는 2017년 대기업 통신회사 콜센터로 현장 실습 나갔던 고등학생이 5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전반은 실습생 소희의 시점, 후반은 형사 유진의 시점으로, 한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추적하는 구조다. 감독은 이 사건을 처음 접하고 한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도 힘든 엄청난 강도의 감정노동을 하는 콜센터에 어떻게 고등학생들이 있지?”


그렇다. 감정노동과 여성, 너무 익숙한 조합인데, 고등학생은 낯설다. 해 본 사람은 안다. 감정노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돌봄과 감정노동을 여성화하고 허접하고 값싼 노동으로 취급하는 게 현실이다. 나는 심지어 여성의 타고난 재능이고 소명이고 본분이라 배우고 살았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그렇게 요구받았고, 또 스스로 알아서 늘 남을 돌봤다. 내 몸과 영혼이 소진되고 암 수술대에 오른 10년 전까지만 그랬다.


콜센터는 어린 여성들이 극한의 감정노동으로 착취당하는 성별 노동 현장을 잘 보여주었다. 어른도 힘든 노동강도를 어린 실습생 노동자로 돌려막기, 설명할 언어가 모자랄 정도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희는 현장 실습 파견에 앞서 아버지 연서로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교칙과 파견 근무하게 되는 회사의 사규를 엄수할 것은 물론 현장 근무 장소 무단이탈 및 학생 신분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열심히” 임하겠다고. 본인 과실로 일어난 안전사고에 대해선 학교 측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겠다고. 이건 침묵의 강요였다.


견디기 힘들어하는 소희를 불러 담임은 장황하게 자기말만 한다.


“이게 다 교과과정의 일부라고. 너 인마 그렇게 해가지고 학교에 미치는 데미지가 얼마나 큰지 알어? 응? 거기서 인제 우리 학교 아이들 안 받겠다 하면 어쩔 뻔했어. 니가 후배들 앞길까지 막는 거야. 게다가 간신히 취업률 달성해 가는데 우리 반은 또 무슨 망신이야.”


기업도 학교도 관계기관도 각자의 실적과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다. 소희는 일할수록 자기를 잃어가고 점점 우울해진다. 출구 없는 노동에 고립되어 겨울 저수지에 몸을 던지고 만다.





어떤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 한숨 속에 토론이 끝났건만 회원들은 바로 줌에서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학교는 왜 ‘권리’보다 ‘의무’ 서약만 받기 급급할까. 노동할 몸, 내 몸에 대한 권리를 먼저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근로기준법 제4조(근로조건의 결정)를 보라.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 동등한 지위, 자유의사, 공허한 미사여구가 아닐 수 없다. 서약, 선서에 국민교육헌장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지난 노동절에 또 한 사람의 노동자가 분신으로 사망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간부인 그는 폭력‘행위처벌법상 공동공갈’ 등의 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죄없이 정당하게 노조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라 한다”라며 유서를 남겼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며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로부터 53년이나 흐른 지금, 여기, 아직도 노동자는 자기 몸을 불살라 외치고 있다. 근로기준법이 보장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노동자를 지켜주지 못하는 근로기준법. 이런 형용모순을 알게 되었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노동자 측과 사용자 측으로 나눠 토론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근로기준법의 목적을 논하며, 당당한 계약 주체로 공부하고 준비하는 학교생활을 꿈꾼다. 그런 세상을 위해 몸을 불사른 사람들이 있었다. 여전히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못 배우고 어른이 돼 버린 나 같은 사람은 지금이라도 한다. 노동하는 몸, 이제라도 노동법을 공부하는 이유다.


다시,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 내 몸을 돌보는 것 너머 내 몸을 둘러싼 세상을 응시한다. 나는 몸으로 나고 몸으로 살다 몸이 죽을 것이다. 나는 몸으로 노동하고 몸으로 관계 맺고 산다. 재생산 노동, 공부 노동, 돌봄 노동, 글 쓰는 노동, 말하는 노동, 활동하는 노동… 나는 노동하는 몸이다. 노동하는 몸, 노동법은 내가 접수한다!


(새가정 6월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식약동원(食藥同源), 무염 현미쑥가래떡 하나 드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