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 쓰는 사람입니다

이고은의 <여성의 글쓰기>와 함께 글쓰기 연습하는 벗들을 생각하며

by 꿀벌 김화숙

만나고 싶은 이고은 작가에게!


안녕? 아이들이 잠든 고요한 시간 너는 글을 쓰고 있겠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공통점 하나 믿고 생면부지의 너를 친구라 부르며 들이대 보는구나. 좋지? 경단녀로서 두 아이를 양육하는 어려운 시기를 글쓰기로 돌파해가는 너에게 무한 존경과 응원과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네 책 《여성의 글쓰기》(김고은, 생각의힘, 2019)는 글쓰기 기술보단 관점을 강조하는 책이구나. 이런 책을 내가 더 젊은 시절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했단다. 이제라도 페미니즘 토론 벗들과, 글쓰기 벗들과 ‘여성의 글쓰기’를 연습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럴수록 글쓰는 노동자, 작가, 김고은 동지에게 참 고맙다는 말 응원의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소이 우나 에스크리토라. 나는 글 쓰는 사람입니다.”


이 스페인어 한 문장으로 풀어간 책 머릿글이 참 좋았어. 내가 좋아하는 문장 “작가라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니까 작가다”랑 닮았어. 너는 겸손할 말로 했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 소개하기 면구스럽단 말에 나도 공감해. 글쓰기 관련 책을 쓰자는 제안이 부답스러웠겠지, 암. 결국 쓰기로 결정한 이유를 읽고 나 심쿵 했잖아. “내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절실함”, 그게 딱 내 말이이었기 때문이야. 혐오와 소외의 시대에 자신의 언어를 찾는 길에, 존재 증명의 길 위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 만나서 참 반가워.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처음부터 작가였어. 학교에서 가정조사서 가져오면, 아빠 칸에는 목회자, 엄마엔 ‘작가’라 쓰라 했던 기억이 나. 그때마다 우리가 작가님 책은 언제 나오냐 장난쳤지. 엄마 대답은 “기다려 봐. 너희 셋 다 크면 책 나올 거야.” 늘 그랬어.”


2022년 가을 내 책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가 나왔을 때 딸이 친구들한테 한 말이래. 비슷한 중년의 엄마를 둔 서른 살 젊은이들이 친구 엄마의 출간 소식에 ‘열광’한 모양이야. “언제부터 엄마가 글을 썼어?”라 묻는 친구들에게 딸이 기억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었겠지. 맞아. 덕분에 기억 저편에서 살아난 ‘글 쓰는 사람’이 새삼 ‘허세 또는 절박함’으로 읽히는구나.


나는 대학 가면 막연히 ‘세계를 누비는 여류 명사, 외교관’이 될 줄 알던 촌뜨기였어. 세상 물정이라곤 모르면서 가슴엔 불이 있는 청춘이었지. 시대와 술 속에 방황하다 보수적 선교단체를 만났어. 28살에 결혼하고 해외선교사 6년 후엔 두 아이 엄마로 귀국했어. 세 아이의 엄마로, 집 안팎에서 종종거리며 양육하고 돌보고 상담하고 가르쳤지만, 다 그림자 노동, 세상은 나를 ‘사모’ 또는 ‘전업주부’라 했지. 애들한테라도 엄마는 ‘작가’라 말하고 싶었겠지?



‘글 쓰는 사람’ 덕분에 대학 1학년 겨울 첫 성경 공부와 ‘소감’이 생각나네.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는 몇 쪽의 글을 써 갔어. 내 낭독을 들은 선배가 웃어제끼며 피드백을 했어. “글쓰기를 좋아하나 보네. 성경 소감은 소설이 아니라, 강의안을 따라 적용하는 것. 회개와 결단을 써야” 한대. ‘가이드라인’인 셈이었지. 단체를 떠나기까지 20여 년 나는 매주 그런 글을 썼어.


새 천년이 밝았을 때 내가 속한 단체가 시끄러웠어. 박정희를 닮은 세계 대표의 독재적 리더십이 문제였지. 그를 지키려는 쪽과 변화를 원하는 편으로 단체가 분열되고 있었어. 우리 부부에게 한국 대표가 한식집에서 밥을 사주었어. 어려운 시국이니 중간리더들을 관리하는 셈이었지. 밥보다 정확한 상황을 더 듣고 싶다고 말하는 내게 돌아온 즉답이 뭔지 아니? “사모님은 궁금해하지도 말고 알려고도 말고 묻지도 마시라. 조용히 기도만 하시라.” 아~ 그게 당시의 내 좌표였어. 나는 늘 그랬듯 더 따지진 못했어. 다만 얼마 후 우린 조직을 떠났어.


40대를 흔히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위치에 도달한다고들 하지. 나는 전혀 아니었어. 소속도 없는 프리랜서 사역자인데 사회복지사 직장 초년생이 됐어. 사회복지현장도 이전에 경험한 단체와 별반 다르지 않더구나. 권위주의적 리더십 아래 나는 말단 직원이었지. 내가 어떤 공부를 했고 무슨 경험을 했건, 나이가 얼마건, 난 애 키우다 나온 아줌마일 뿐이었어. 나는 자기 목소리가 없는, 죽자고 그림자 노동만 하는 운명이었던 거야.


무엇에 끌린 듯 글쓰기를 했어. 나를 해석하고 화해하게 할 언어가 필요했겠지. 나는 어쩌다 이렇게 살고 있는지, 나만 이상한 인간인지. 글 쓰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았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블로거로, 자서전이니 소설이니,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렸어. 직장에서도 틈만 나면 글을 썼겠지. 그러면 뭐 하니. 결정적으로 나는 오랜 세월 시선이 안으로만 향해 있었더구나. 네 책을, 페터 비에리의 목소리를 그때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면세계의 윤곽을 서술하기에 알맞은 표현을 찾으려 탐색하는 일은 내적, 정신적 눈으로는 이룰 수 없어요.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이 펼쳐지는 세계는 고치 속에 갇힌 양 홀로 존재하는 영역이 아니기에 시선이 외부로 향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216쪽)


나는 자기성찰을 잘 하면 세상을 알게 될 줄 알았어. 특히 진보를 논하는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며 난 다른줄 알았지. 허나 시선이 외부로 향하지 않으면 내면세계도 바깥 세상도 다 모르는 거였어. 고은아. 9년 전 내게 암수술이 기회가 되었어. 자연치유와 갱년기 분노 에너지 덕분에 안으로만 향했던 내 시선이 밖을 보게 됐어. 책과 영화, 토론과 글쓰기로 사람들 속으로 갔어. 나를 둘러싼 구조를 보게 되고 페미니즘이 새로운 모국어가 되었지 뭐니. 더 이상 “남편을 순종하는 아내”는 없어. ‘거룩한 분노’의 목소리를 내는 내가 있지.


이후 내 책장엔 비슷한 책이 늘고 있단다. 《그녀가 말했다》, 《침묵에서 말하기로》,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여성, 목소리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여성이 말한다》,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최근엔 네 책 《여성의 글쓰기》까지 더해졌어. 나는 열광해, 너처럼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글쓰는 여성에게 말이야. 나만 그런 게 아니었고 내가 특별히 이상한 게 아니었더구나. 침묵을 깨고 말할수록 구조 속의 내 위치가 보였어. 너처럼 글로 나를 자유롭게 하는 사람,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아.


고은아! 글 쓰는 사람으로 만나서 반가워. 존재 증명을 넘어 세상을 바꾸려는 우리는 동지로구나. 구조를 가리고 개인에게, 여성에게, 그리고 소수자에게 탓을 돌리는 ‘개소리’에 분노하자. 함께 글 쓰는 벗들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내자꾸나. 우리는 글 쓰는 사람이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성의 몸, 감정노동, 그리고 근로기준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