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만에 보는 집 밥을 나는 '눈으로만' 먹었다.
내 저녁밥은 여전히 효소 물이 됐다.
단식 기간을 조금 더 늘려 2주까지 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단식원에서 운전해 집에 온 짝꿍이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 준비를 했고 나는 입으로 '훈수만' 했다. 밥이 되는 동안 나는 여행짐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나를 기다려 준 홍시는 당장엔 먹을 수 없으니 냉동실에 갈무리했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요리하는 짝꿍 곁에서 들깨도 갈고 바닥 발 걸레질도 했다. '3주간의 주부 부재'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정상' 집이었다.
"밀양 무는 속이 이쁘지 않다며? 빨리 먹는 게 좋아."
내 말이 떨어지자 그가 대답하며 무를 손질했다.
"응, 알았어. 그럼 무나물 하면 되겠네."
"좀 많이 해서 서울도 가져가. 잘게 채 썰 필요 없이 굵직굵직하게 해도 돼"
내 말에 따라 그가 물 쪼금 넣은 궁중팬에 무를 넣고 한 번 끓였다. 마늘과 들깨가루를 넣고 섞어 조금 더 익혀냈다. 우리 집에서 익숙한 기름 안 쓰고 나물 볶는 걸 그도 능숙하게 해냈다. 단순 소박 자연식 밥상이 차려졌다.
들깨로 버무려진 무나물 볶음이 큰 그릇에 담겼다. 현미밥, 배추 된장국, 생배추, 생당근 조각에 쌈장, 그리고 단식원에서 가져온 산나물 절임 김치. 직장에서 배고프게 퇴근한 딸이 된장국물 한 술 뜨곤 감탄했다.
아빠! 된장국 너무 맛있다.
와~~ 맛있어서 더 먹겠는걸!
나 없는 동안도 이렇게 아빠가 요리하고 딸은 퇴근해서 밥상 받는 생활을 해 온 부녀였다. 익숙하게 단순 소박한 자연식 밥상을 준비하는 중년 아빠와 그 밥을 즐기며 수다 떠는 20대 딸.(물론 딸이 밥하는 날도 있다) 나는 흐뭇하게 지켜보며 효소를 홀짝거렸다.
새삼 옛날 시골 내 어릴 적 우리 집 풍경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안 계신 날은 어린 내가 아버지 밥상을 차려야 했다. 아버지가 해 주는 밥을 먹은 기억은 전혀 없다. 대신 아직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딸로서 집안 일과 밥을 배웠다. 내가 아버지 밥상을 차려야 하는 날의 부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밥상에 무얼 차려야 할지 전전긍긍했던 기억. 너무 드실 게 없는 상이면 어쩌나. 요즘 같으면 젊은 아빠가 밥을 해서 아이들 먹일 텐데. 어머니가 안 계신 집이 내게 싫은 이유엔 아버지 밥상차리기도 있었다.
결혼 30년 동안 우리 부부가 가장 '투쟁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이분법을 허무는 것이었지 싶다.
거창하게 말해 성별 노동 이분법. 여자 일 남자 일 경계에 의심하기였다. 나는 보고 배운 대로 결혼 처음부터 당연한 듯 밥을 했으니까. 밥은 엄마 일이고 여자 일이라는 통념을 내 안에서 인식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늘 밥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빠는 어쩌다 이벤트로 해준 음식으로 아이들의 인기를 크게 얻었다. 반면 날마다 영양과 맛을 고민하며 밥하는 엄마는, 맛이 없네 괴식이네, 품평과 불평을 견뎌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공통된 통찰에 도달했다.
이거야말로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이분법의 저주에 갇힌 거라는. 경계를 허물고 둘 다 요리를 일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좋은 관계라는 것. 진짜 평등하고 유기적인 관계엔 성 역할 고정관념이 없다는 것. 살면서 예상 못 한 돌발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이 작은 공동체에 그런 풍파가 닥쳐봐라, 이벤트로 밥하는 걸로 되겠냐. 어쩌다 '돕는' 부엌일 말고 자기 일로서 모두가 일상으로 할 수 있여야지!(노동 여건 상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분들 많다는 거 안다. 죄송!)
내가 암 수술한 건 그런 구조조정의 변곡점이었을 거다.
엄마가, 아내가, 주부가, 혼자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라도 자기 몫의 집안일은 스스로 책임지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짝꿍이 밥하는 날이 더 늘고 부부가 집안에 같이 있을 땐 같이 준비하는 게 점차 일상으로 자리 잡아 왔다. 내가 글쓰기나 다른 활동에 바쁘면 그가 밥을 하고 그가 바쁘면 내가 하는 식이었다.
이번 자연치유 겨울여행을 떠나면서도 나는 음식을 해놓고 갈 고민 하나 없이 홀홀히 떠날 수 있었다. 짝꿍은 분명 계속 진화하고 있었다. 아직 살짝 느리긴 하지만.
밥을 먹고 있는데 가족 톡이 계속 울렸다. 자취생 막내아들이 저녁 밥상 사진을 찍어 올린 거였다.
"오~~ 요리 맨!"
"세상에 맛있겠다. 이거 누가 다 한 거냐?"
"친구도 반찬 좀 가져온 거냐?"
"뭔 소리. 내가 다 한 거지. 얘들 밥 두 그릇씩 뚝딱해 버리네?"
코로나 단계가 올라갈수록 자취생 젊은이가 밥을 해 먹는 날이 늘 수밖에 없겠다. 날로 요리 감이 잡히고 재미가 있다는 게 녀석의 고백이었다. 인터넷을 보고 하나씩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가족 톡이 시끌해지곤 했다. 나는 단식원에 있으면서 녀석이 올려주는 음식 사진에 날마다 침을 삼키곤 했다. 두 친구와 밥이 세 그릇인데 숟가락은 모자라는 자취생 살림이겠다. 모자란 숟가락 젓가락이 가지가지 놓인 게 보였다.
엄마! 요리를 하다 보니 있지,
혼자 먹기 너무 아쉬운 거야.
누군가 먹여주고 싶더라?
친구한테 좀 갖다 줬지.
어제 통화할 때 그런 고백을 하더니, 이번엔 친구들 불러 같이 먹은 얘기였다. 코로나 시대라 언택트 언택트 하지만 사람은 어떻게든 어우러져 사는 거 아니겠냐. 조심스럽지만, 잘했구나. 친구들이 자주 해달라고 했단다. 스스로 메뉴를 고민하고 조리법을 찾고 재료를 사고 준비하며, 먹일 생각으로 즐거웠겠지. 먹으며 수다 떨며 몇 배로 맛있는 시간이 됐겠지. 그래, 그거야. 누군가를 해 먹이고 싶은 맘, 그건 결코 엄마만의 전유물 아니지?
기말 끝나고 집에 가면 엄마한테 맞는 걸로 맛있는 거 해 줄게!
얼쑤~~ 지금까진 집에 오면 자취생 취향의 음식을 만들어 식구들을 감동시킨 우리 막내다. 이제 단식 끝난 엄마에게 잘 맞는 음식도 해 주겠다니. 스스로 음식 해 먹는 이 젊은이가 왜 이리 대견할까. 알고 보면 전혀 대견할 거 없는 당연한 일인데. 아들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해 본다. 결혼하고 아이 키울 때쯤엔 '부엌일은 엄마 일' 따위 통념이 사라질까. 완전히 사라지기야 하겠나 만, 저런 남자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세상은 변해갈 것이다.
내 단식 기간을 두 주로 늘리는 건 똥 때문이었다. 적지만 똥에 아직 부유물과 찌꺼기랑 점액질이 나오고 있다. 기왕 시작한 거, 11일까지 잘 온 거, 좀 더 비워내고 싶어서다. 가족 식탁 앞에 앉았는데 생각보다 할만했다. 나는 효소를 마시고 식구들은 밥을 먹었다. 단식 초기라면 몰라도, 빈속에 익숙해진 지금은 힘들지 않았다. 생무 한 쪽 씹어 즙만 삼키고 뱉어냈다. 된장국 한 모금 맛봤다. 그 정도로 평안이었다.
자취하는 대학생 막내가 만들고 찍은 자취생 요리 사진들에 내 눈이 한참 머무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