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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02. 2024

부끄러움의 예감 1987 봄

그날이 내 인생의 부끄러움으로 남을 거란 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공부에 별 뜻도 없으면서 대학 선교의 물결에 실려 나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됐지만 생활장학금은 이제 없었다. 한 살 아래 여동생이 취업해 생활비를 댔고 나는 목자 일에만 몰입했다. ‘양 치는’ 일 외엔 내게 중요한 일이 없던 시절이었다. 돈이 없어도 아르바이트로 쓸 시간은 아까웠다. 한 주 15~20팀 성경공부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2학기를 어찌어찌 마치고 1987년 새해를 맞았다. 1월에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 는 이상한 소식이 들렸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었다. 내 남동생 나이의 학생이 경찰에게 고문받다가 죽었다는데,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대학가엔 최루탄 연기가 점점 더 자욱해졌다.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구호가 늘 귀에 맴돌았다.   

   

선교 단체 분위기는 바깥 세상과 아주 달랐다. 주일 예배에서도 모임에서도 공부에서도 박종철 이야기는 없었다. 데모는 하나님의 주권과 때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 다. 어린양들이 데모에 ‘휩쓸리지 않도록’ 성경 말씀으로 잘 도우라, 목자들은 흔들리지 말고 더욱 깨어 기도하고 중심을 지켜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 그런 방향과 지침이 있을 뿐이었다.    

    




B형 간염은 내게 무엇이었나         


1987년 봄, 나는 대학원을 휴학해야 했다. 수업만 간신히 참석하전공 공부구체적 방향이 필요했고 목자 생활에 피로감도 있어서였다. 좋은 조건의 입주 과외 아르바이트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매일 이른 아침 등교해서 캠퍼스를 한 바퀴 돌 땐 전공과 진로를 생각했다. 머리아팠다. 나는  도서관이나 대학원이 아닌 선교 센터로 결국 향하곤 했다. 길 잃은 느낌이 내 가슴 고 있었다.     


4월에 몸이 심하게 아팠다. B형 간염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한 주 이상 병원에 누워 TV로 바깥 소식을 들었다. 최루탄 냄새가 병실까지 왔던 기억이 난다.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신부님들을 처음 게 되었고 명동성당이 화면에 자주 보였다. 하나님 일을 하는 사제들이, 성당이, 저렇게 데모를 지지할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저분들이 세속적일까, 데모하지 않으면 '영적'인 걸까, 내가 길을 잘못 가는 건 아닌지, 문득문득 생각해 보게 되었다.    

 

퇴원 후 의사의 지침을 따라 고향집으로 향했다. 입주 아르바이트 집에서도 짐을 싸야 했다. 만 25세, 서울 생활 6년여 시간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금의환향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빈손에 병든 몸이었다. 잘 못 산 느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술과 허랑방탕한 생활이 간을 괴롭혔을 것이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 몸을 돌보지 않는 생활이었지. 간염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낙향해서 절대안정하며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자기 뜻에 도취되어 엄마를 버렸지만  필요할 땐 결국  엄마에게 돌아가는 자식이었다. 나는 엄마를 버렸노라 했지만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당신의 기대와 소망을 박살 낸 딸이었건만 엄마는 환대로 안아주었다. 하나님 일하랴 공부하랴 고생했다며, 건강해야 목자도 하지, 지극정성으로 딸을 돌봐주었다. 새벽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주의 종이 온 걸 사람들이 어째 알았을까. 봐라, 또 쇠고기 선물이 들어왔다.”

“아이고 그 집사님 집에 난데없는 떡이 생겼는데 우리 집에 갖다주고 싶더란다.”

니를 하나님께 드렸더니 너그 아버지 찾는 사람이 자꾸 는다. 돈이 날마다 들어온다.”

    

그랬다. 나는 모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쉬었다. 엄마한테 잘하려 애쓰지도 않았고 집안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동산 중개는 빚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호황이었다. 두 분이 싸우는 일도 없었다. 시끄러운 서울과는 다른 시간을 살 수 있었다. 내가 버린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지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왜 주의 종을 핍박합니까     


니가 4학년 때 내가 서울 갔다가 쪽지 써놓고 떠났잖아. 그 길로 내가 어디 갔겠노. 기도원에 가서 니 때문에 속이 상해 울고불고했지. 너그 아부지도 속 썩이지 자식들은 저그 잘났다고 한 놈도 엄마 말 안 듣지, 죽어버리고 싶었니라. 그래도 우째노. 기도하고 울고 나면 마음이 좀 누그러지고, 다시 천불이 나면 또 기도하고 그랬다. 니를 우째야 할지 답답하더라.     


기도원에 가모 개인적으로 면담해 주고 기도 해주는 목사님이 있니라. 거기 원장 목사님 방으로 하루는 면담을 받으러 갔지. 니 문제를 털어놓고 조언을 들을 요량이었지. 목사님 앞에 앉으니 가슴이 두근거리더라. 니 얘기를 어디서 우째 시작할꼬 입을 열려는데 이 목사님이 나를 보고 갑자기 호통을 치는 거라.      


“아니 주의 종을 핍박했구먼. 큰일 날 사람이네. 주의 종을 왜 그렇게 핍박하냐고!”

내가 놀라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대답했지.

“아이고 목사님, 제가 주의 종을 어떻게 핍박해요. 그런 일 없습니대이. 교회 가면 목사님 말씀 듣지, 목사님을 핍박했다니. 억울합니대이…”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그 목사님이 더 화를 내며 내 등짝을 마구 때리는 거라.

“어디다 거짓말을 합니까. 분명히 주의 종을 핍박했어요. 지금도 하고 있네. 회개하시오!”


등짝을 얼마나 맞았는지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니가 생각나더라. 내가 솔직히 말했지.     

“거짓말은 아니고요 목사님, 주의 종이라 카니, 실은 우리 딸을 좀 핍박했습니다. 대학생 딸이 선교회에 가더니 선교사 한다, 주의 종으로 산다 그러잖아요. 대학생이 공부나 하지 그러면 안 된다고 뜯어말리고 제가 좀 핍박했습니다. 똑똑한 딸이거든요. 그게 문제인가요?…”


내가 눈물콧물 흘리며 고백했다. 참 같잖제? 그 목사님이 그러더라.

“그럼 그렇지. 아니 목사만 주의 종인 줄 알아요? 딸이 아주 훌륭한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종이니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감사하고 복덩이니까 잘 섬기세요. 알았어요?”     

그러곤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해 주더라.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더라.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도행전 그 말씀이 떠오르더라. 내가 잘못했습니다, 눈물로 회개했다. 니 때문에 참 많이 울었니라. 에미가 잘못했다…         

      



이 때니이까?     


그렇게 엄마는 나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랑해 주었다. 한 달여 쉬는 동안 몸과 맘이 안정되면서 다시 사명으로 복귀하고 싶어졌다. 새 학기 씨 뿌릴 시기를 놓쳤으니 올해 제자양성 ‘농사’가 걱정되어서였다. 이 시국에 서울은 양치기 어려운 세상일 것이었다. 어버이날을 모처럼 부모님과 함께 보낸 후 5월 후반에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아버지한테 용돈까지 두둑이 받아서 말이다.


서울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운 데모의 도가니였다. 캠퍼스 심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고 성경공부하러 오는 학생도 잘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시국 이야기를 쉬쉬하던 센터가 그땐 좀 달랐다. 학생 리더 중에 적극 데모에 가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고 이야기도 들렸다. 나와 성경공부하던 남학생한테 들은 말이 내 가슴에 박혀 어느날 몇몇에게 털어놓았다.   

    

“와, 어제 내 양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거 들었어? 한가하게 성경공부나 하고 있냐는 거야. 자긴 당분간 성경공부 안 올 거래.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데모에 참여해야 겠다네. 전에 같으면 뭐라고 말렸을 텐데, 나도 괴로워 말을 못 하겠더라니까….”

내 말을 들은 벗들이 조심스럽게 받았다.

“우리가 나가면 센터에 문제가 될까? 양심이 찔리고 양들 보기 부끄러워 너무 힘들어.”

“나도 요즘은 자꾸 고민이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봄이 가는데 선교 센터는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교 수업도 휴강이 많았다. 데모 때문에 일대일 팀 수도 주일예배 참석자도 ‘실적’이 낮았다. 양 한 명 얻기가 어려웠다. 최루탄 때문에 학교에 오지를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열성 목자들 중엔 집회에 가서 양들을 빼내 데려오다 욕을 먹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학과에 소속감도 없었는데다 휴학생이라 이젠 더 연결된 모임이 없었다. 혼자 찾아 나갈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간염 환자에 B형 간염 보유자 아닌가. 몸 생각하며 무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답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정치학 전공한다는 걸 누가 알까 두렵고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남동생도 데모하다 구치소를 다녀왔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옥살이하신 우리 할아버지께도 면목없습니다.) 그럴수록 나는 양들을 위한 기도에 몰입했다.     


박종철에 이어 6월엔 이한열이란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제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날은 서울 시내 대학마다 동시에 데모가 있는 날이었다. 귀는 바깥을 향하고 몸은 안에 웅크리고 있는데 친한 법대 후배 L이 다가왔다. 며칠 전에도 서로 속을 터놓은 우리는 눈빛으로 마음을 읽고 있었다.


“목자님, 우리도 나갈 때 아닐까요? 이러고 있어 봤자 양도 안 와요. 같이 가요.”

나는 찔리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무어라고 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어쩔 거예요? 이젠 진짜 때가 된 거 같아요. 이젠 못 참겠어요.”

나도 비슷한 생각이라 더 미안했다. 다른 사람이 듣는 데서 말할 자신이 없어 후다닥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뛰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학교 정문에서 2백 미터나 떨어졌을까, 옥상에선 모든 게 다 보였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박종철을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우리는 말없이 서서 구호 소리를 들었다. 캠퍼스와 정문, 정문 앞을 막고 있는 경찰차들, 그리고 대로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차라곤 한 대도 다니지 않고 사람들만 가득한 차도가 낯선데 정말 장엄한 풍경이었다. 학생만이 아니라 흰 셔츠만 입은 직장인들, 남녀노소가 다 섞인 군중이었다. 지금까지 본 가장 큰 규모였다.       

거스를 수 없는 저 물결에 속하지 못한 게 훗날 큰 부끄러움이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나도 저기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런데 내 몸을 생각하느라 이러고 있나 봐. 믿음이 필요한 거 같아. 데모하는 것보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성경공부가 나라를 위해 더 큰 일 아닐까?”

L이 내 말을 듣고 있었지만 나는 내 말에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배웠을 뿐,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도행전 1장 6,7절을 암송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들은 대로 내가 주석을 달았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 회복할 때가 지금이냐 했지만 예수는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있다고 했다. 데모는 이 땅의 일이지만 복음전파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일이다. 데모는 우리 알 바 아니고 복음 전하는 게 우리 일이고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렇게 주억거렸을 것이다.     

  

그랬다. 정치적 문제, 사회적 정의에 대해 성경공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영적 일 육적 일, 하나님 일 세속 일, 죄와 의, 이분법만 있었으니까. 정치적 투쟁은 영적이지 못하고 믿음 없는 짓이었다. 예수는 직접 로마 식민주의자들과 싸우지 않았고 데모대도 조직하지도 않았잖아. 예수 제자라면 정치 투쟁 말고 ‘영적인’ 일을 하라. 정권이 바뀐다고, 민주화가 된다고, 하나님나라가 되는 건 아니라는 논리였다.     


L도 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에 그가 데모하러 갔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소심하고 비겁한 겁쟁이란 느낌이었다. 성경으로 비겁한 마음을 달래려 애썼지만, 그날이 내 인생의 부끄러움으로 남을 거란 예감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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